전근대에 왕정이 보편적이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피지배계급이 왕정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박혀 있는 이 관념이 왕정의 절대근거였다. 왕정이 자신의 노동과 생산을 일상적으로 털어가더라도 감히 저항을 꿈꾸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니, 왕이 죽으면 흰옷을 입고 눈물을 쏟았다. 왕이 민초들에게 무엇이기에! 이른바 '태극기 집회'를 보면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 아직도 왕정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박근혜의 탄핵을 넘어 사람들의 '머릿속의 왕정'을 지우는 일도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너 달 전까지 집권 여당에서 온갖 '올바르지 못한' 짓거리를 벌이던 사람들이 일부 몰려나와 갑자기 '바른' 정당을 만들었단다. 물론 그들만의 이야기다. 집권당으로 있을 때 저질렀던 짓거리에 대해 깊은 반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시라. 이들이 노동자와 농민, 비정규직, 청년실업자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평화통일에 대해, 세월호 유가족의 눈물을 닦아주고 진실을 찾는 일에 대해 어떻게 행동했던가를.
촛불이 박근혜를 탄핵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 이 혁명은 최종적으로 나와 우리의 삶에, 나와 우리의 삶을 옥죄었던 모순의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같은 일을 하고도 임금을 절반밖에 못 받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법과 민주적 절차를 지키라고 요구했다가 여전히 해고 통보를 받거나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소수자라서 차별을 받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슬픔이 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정현 씨는 지난 8월 새누리당 대표로 뽑혔을 때 "모두가 근본 없는 놈이라고 등 뒤에서 저를 비웃을 때도 저 같은 사람을 발탁해준 박근혜 대통령께 감사하다" 말했다. 그가 내뱉은 '근본 없는 놈'이란 한 마디가 마음에 걸린다. 근본의 유무를 따지는 것은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던 전근대의 발상이다. 이정현 씨는 엉뚱하게도 '근본 있는' 박근혜 씨만을 섬기고 그를 결사 옹위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차별 받는 노비가 노비-주인의 불평등한 관계를 몰각하고, 주인이 던져준 찬밥 한 덩어리에 감읍한 나머지 충성을 다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미국 남북전쟁의 한 꼬투리가 된 노예제를 천하에 몹쓸 제도로 비판한다. 『엉클 톰스 캐빈』과 같은 소설, 『뿌리』와 같은 소설·드라마, 『노예 12년』와 같은 영화,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미국의 흑백갈등 등에서 얻은 판단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우리의 역사, 그것도 가까운 조선 사족체제가 노비(노예)의 노동력의 수탈함으로써 성립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
말이 좋아 성과연봉제지,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전체적으로 지급하는 임금의 총량은 전과 같거나 줄어들어 손해 볼 것이 전혀 없다. 아랫것들은 서로 앞줄에 서려고 치고받으니, 혹 생산성이 높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경쟁하느라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감히 항의 한 번 하지 못할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성과연봉제로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높아진 생산성으로 얻는 이익을 차지하는 자들은 누구겠는가. 아마도 지시와 명령을 받으면서 나날이 경쟁하는 '을'들의 몫은 아닐 것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은 모든 백성에게 최소한의 의식주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토지, 곧 영업전(永業田)을 지급하고 그 토지만큼은 어떤 경우도 매매할 수 없게 법을 제정하자고 제안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공짜로 땅을 나눠 주자고 하니, 역시 나라에서 기본소득을 보장해 주자는 발상이 아닌가. 이러고 보니 기본소득이란 것은 딴 나라에서 만든 이상한 제도가 아니라 우리의 훌륭한 조상님이 제안한 제도이기도 한 것이다.
과거 해외에서 독립운동 할 때는 물론 해방 뒤에도 어떤 일에 의견을 같이하고도, 결국 인사 문제로 인해 분열되는 일이 많은데, 그 원인은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사욕에 있다는 것이다. 백범은, 해방 정국의 허다한 당파와 세력들의 분열과 분규는 민족과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국가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아니 사유하고자 하는 개인의 욕망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