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이후 생긴 변화
두구두구두!
문동은·우영우·차정숙….
다 챙겨 본 내가 미워지는....
대.환.영.
세상의 모든 문제가 토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떠한 주제는 토론을 거친 투표를 통해 그 의미가 결정해서는 안 되는 주제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이들을 위한 교육시설의 문제이다. "모든" 인간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모든 인간"에서 "모든"은, 추상적 지칭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을 지칭한다. 육체적/정신적 장애를 지닌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교육권/학습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 따라서 필요한 곳에 그들을 위한 교육시설을 짓는 것은 토론을 통하여 결정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학교"란 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서,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혐오시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정통'에 의한 '이단 박해'의 역사이기도 하다. '정통(orthodoxy)'은 '올바른/곧은'의 의미를 담고 있고, '이단 (heresy)'은 '선택' 또는 '의도적 결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때 여성설교 허용, 여성안수 지지, 노예제도 반대, 다른인종간 결혼 지지 등이 '이단'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여성안수 지지가 교회의 '정통'교리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기독교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제 현대 기독교 안에 가장 커다란 논쟁이 되는 세 가지 주제를 들자면 인공유산, 여성안수, 그리고 동성애 문제이다. 이 세 가지 문제가 각기 다른 것 같지만, 사실상 그 인식론적 뿌리에는 "남성중심주의적 가부장제"가 버티고 있다.
한국의 기독인들은 '이단'이 됨으로써 예수의 가르침을 비로소 실천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대부분 우리 인간은 조금씩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며, 조금씩은 못나기도 하고 조금씩은 그런대로 괜찮은 존재이다. 내가 여타의 '영웅적 서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다. 변혁이나 저항 등의 역사적 사건들은 사실상 소수의 '영웅'들에 의하여가 아니라, 이렇게 조금씩 못나기도 하고 이기적이기도 한 개인들이 그 '인간됨'의 모습을 가까스로 지켜내면서, 자신과 타자들에 대한 책임성을 아주 작은 귀퉁이에서 나누는 행위들에 의하여라고 나는 본다. 이 〈택시운전사〉에서 나는 그러한 '탈 영웅적 저항'의 모습들의 일면들을 볼 수 있었다.
이번 공개강연에 참석한 청중은 70%가 한국인이고 약 30%만이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태국 교수의 강연이 끝나고 내 차례가 되기 직전에 나는 내가 이중언어구사자이니 통역자 없이, 영어로 하고 그다음에 한국어로 하겠다고 이 프로그램의 담당교수에게 쪽지를 보냈다. 내가 강연자와 통역자 역할을 하는 것이 청중과의 거리 좁히는 데에 훨씬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연을 시작하면서, 나는 청중들에게 영어가 자신의 모국어인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했다. 한 사람도 없다. 이 세계에서 주변부 언어에 속하여 살아가는 이들의 비애이다. 그 누구의 모국어도 아닌데, 우리는 영어를 해야만 '글로벌' 한 프로그램이라고 간주한다.
뉴스에서 내게 신선하게 다가온 것 중의 하나는 대통령이 초등학생과 대화하는 어투였다. 대통령은 미세먼지에 대한 경험을 열심히 이야기하는 한 학생의 이야기를 경청한 후, 그 학생에게 "미세먼지 걱정 때문에 바깥에서 놀기도 걱정되고, 바깥에서 수업도 걱정되고 그렇죠. 그 이야기를 하는 거죠?"라고 응답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대통령'이 작은 초등학생에게 그 흔한 '반말'이 아닌 '존댓말'을 하면서 그 아이와 '평등한 인간'으로서의 몸짓, 눈빛, 그리고 언어를 전하고 있다는 것 - 내게는 참으로 신선한,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어느 특정한 문제에 대하여 진보적 또는 보수적 입장을 지닌다고 해서, 다른 문제에도 그 진보성이나 보수성이 자동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젠더문제에 대하여 진보적 성향이 있다고 해서, 성적지향의 문제에도 자동적으로 진보적 입장을 가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또는 성적지향에 진보적 입장이라고 해서, 노동문제나 젠더문제, 평화문제 등에 그 진보성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현상유지'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비판되고 버려진 가치들을 복고적으로 끄집어내는 이들은, 사실상 '보수주의'가 아닌 '퇴행주의'라고 해야 한다.
매일매일 혐오의 시선과 차별적 제도들에 의하여 고통속에 있는 이들에게 끈기 있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아픈 일이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정의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태에 대한 절망과 좌절이 아니라, 이루어내야 할 정의를 향한 지속적이고 끈기 있는 희망의 끈을 부여잡아야 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말은 이 점에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정의는 기다리지 않는다. . . 그렇기 때문에 정의는 언제나 '다가올 정의'이다 (Justice does not wait . . . But for this very reason, justice remains justice-to-come)."
1)'용서의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2) 언제 (용서의 적절한 시기), 어떻게 (용서의 구체적 방식), 이 '용서'는 가능한 것인가; 3) 가해자/잘못한 자의 뉘우침,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용서의 전제조건인가, 아니면 뉘우침이나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용서는 가능한 것인가; 4) '용서자'가 용서를 하게 되는 경우, 용서자는 잘못된 일에 대한 '분노'를 포기해야 하는가 아닌가 등과 같은 물음들이다.
나는 늘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남자 학생이, 자신의 열 손가락 손톱에 매니큐어를 하고 왔다는 사실보다도, 그것에 대한 다른 학생들 등 주변의 반응이 매우 흥미롭게 보였다. 그 누구도 이 매니큐어에 대하여 별다른 질문이나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열두 명이 둘러앉아 있는 세미나 형식의 수업이기 때문에, 그들의 '무반응'은 그 남자 학생의 매니큐어 한 손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무반응'은 '다름에 대한 존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종종 받는 질문 중의 하나는 '동성애를 옹호하는가 반대하는가'이다. 그런데 이 질문 자체의 방향을 조금만 돌려보아도, 이 질문이 근원적으로 잘못 구성된 것임을 알게 된다. 질문에 다시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누구도 '당신은 이성애를 옹호하는가 반대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이성애'가 바로 자연적인 '규범적 성 정체성'이라고 대부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반기문 전 UN 총장의 '동성애 옹호론자'라는 표현은 그 인식자체의 지독한 한계성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현대의 다양한 연구결과들은 한 사람의 성정체성이 '선택(choice)'이 아닌 '지향(orientation)'이라는 것, 그렇기에 '옹호' 또는 '반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지 오래다.
'미스 박'이라는 호명장치가 여성혐오인가 아닌가 라는 물음 자체는 '예스와 노'만을 강요하는 매우 표피적인 것으로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음에 대한 물음'을 다시 해야 하는 이유이다. 다시 물어야 할 물음들은 첫째, 여성에 대한 호명과 남성에 대한 호명은 각기 '어떠한 가치관'에 의하여 형성되고, 회자되고, 재생산되는가; 둘째, 남성을 호명하는 장치는 '미스터(Mr)'밖에 없는데, 왜 여성을 호명하는 것은 두 가지, 즉 '미스(Miss)'와 '미세스(Mrs)'로 나뉘어지는가; 셋째, 어떠한 이유에서 사람들은(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들도) 이러한 사회적 호명장치에 대하여 문제제기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