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 폭로가 상황반전의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변화를 향한 에너지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차곡차곡 쌓여왔다. 지난 4·13총선 결과가 이미 하나의 변곡점이었다. 무엇보다 참사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세력의 집요하고도 전방위적인 교란행위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거리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었던 노란 리본들의 존재는 작지만 뚜렷한 증거였다. 그것은 마치 '내가 당신의 동료임'을 알리려는 간단없는 발신처럼 보였다. 아무런 설명 없이도 서로에게 전달되는 무언가가 거기엔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고시공부를 하며 외롭게 법전을 뒤적이고 시험문제를 풀어보던 20대부터 언젠가 40대가 되면 검사장이 되고 그러면 비상장회사의 주식을 거저 얻을 기회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혹은 특수통이 되어 수사를 하면서 각종 재산 은닉과 탈세 기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권력을 가진 고위 공직자로 살았으면 비상장 회사를 이용하든 전관예우를 활용하든 수십억 또는 수백억의 보상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식의 생각은 또 어디서 온 것일까? 검사나 변호사로 산다는 것은 범죄와 싸우는 것이기보다 범죄와 멋들어진 미뉴에트를 한판 추는 것이라는 '깨달음'에는 대체 언제 도달한 것인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사회학 용어가 사람들 입에 쉽게 오르내리게 된 배후로 흔히 힙스터 문화가 지목되고 있는 현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진단인데, 이제는 이러한 진단조차 얼마간 익숙해진 게 사실이기도 하다. 홍대 힙스터의 아이콘이었던 혁오밴드가 인기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출연한 이후 주류 스타덤에 흡수되어버렸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문제를 자본 탓으로 돌리는 발상들은 상투적이다. 게다가 더 나쁜 경우 그것은 자본의 위력에 대한 체념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자본의 지배가 엄연한 현실이더라도 그 안에는 그것을 상대화할 계기들이 언제든 싹트기 마련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