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그런데 새해가 정말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을까. 국내정세는 지난해의 연장선이 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6월 지방선거까지는 '적폐청산'의 기조가 이어질 것이고 이것이 정국의 기본구도가 될 것이라고들 한다.
'촛불'은 혁명 맞다. 하지만 생각 없이 혁명을 말하며 기분 내는 것은 촛불혁명의 성공에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자랑하는 촛불항쟁의 평화로운 성격은 고전적 혁명론에 어긋나는 특성이며, 대통령 파면과 정권교체가 기존 헌정질서의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촛불'이 87년체제의 수호요 재작동이지 혁명일 수 없다는 주장도 학자들로부터 제기된 바 있다.
이번엔 드디어 30년 묵은 저 낡은 '87년체제'가 개편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그 문제 많던 제왕적 대통령제가 폐기되고, 승자독식 민주주의가 합의제 민주주의로 바뀌며, 어느날엔가는 드디어 시민 모두가 사회적 자유를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그 좋은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지금으로 봐서, 87년체제의 극복 혹은 전환 여부는 상당 부분 자유한국당에 달려 있는 듯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지가 막막한 때일수록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 하는 일이다. 특히 낡은 언어를 극구 피해갈 줄 알아야 한다. '독자적 핵무장'이니 '전술핵 재배치'뿐 아니라 '북을 대화로 끌어내는 더욱 강력한 제재와 압박'도 낡아빠진 언어이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통일만이 살길이다'는 익숙한 옛 노래를 다시 불러도 곤란하다. 그렇다고 '이제 통일은 잊어버리고 남북이 이웃나라로 평화롭게 살자'는 주장도 새로울 것 없는 공리공론이다. 이 땅은 무작정 통일을 부르짖는다고 통일이 되고 평화가 오는 곳도 아니려니와, 점진적·단계적 과정으로서의 통일마저 외면한 채 두 나라의 항구적 평화공존을 주장한다고 평화가 달성되는 지역도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인사청문회에서 일부 정당들이 보여준 모습이야말로 시민 없는 대의제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문재인정부의 인사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가 원천 배제되고 있는 것도 촛불 거버넌스와는 거리가 있다. 더구나 청문회 제도의 개선책에서도 시민의 역할이 논의되지 않고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문재인정부에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이 참여하는 것이 '시민사회와의 협치'라고 비꼬는 것도 온당치 않다. 과거 보수정부도 민주정부도 시민사회에서 새로운 인물을 '수혈'받았고, 그러한 수혈의 한계도 여실히 보여준 바 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이 요구하는 것은 수혈이 아니라 수술이다.
물론 지금까지 촛불이 이룬 성과만으로도 참여자인 우리들은 기쁘고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우리들 각자가 밝혔던 촛불이 그려낸 거대한 점묘화는 숭고한 감정마저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혁명은 자유를 한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제도화하고 사회적 궁핍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유의 토대를 공고히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비춰보면 촛불혁명은 87년체제 아래서 이루어진 최량의 정치적 성과 중 하나지만, 현재까지는 87년체제의 수호에 머무르고 있다. 촛불'혁명'이 그 이름에 값하는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는 제법 분명한 것 같다.
혁명의 일차적 성공이 혹시라도 4·19 이후와 같은 변질로 귀결되지 않을까, 또는 87년체제의 단순한 변형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어느 자리에서 하든 긴요하다. 그런 점에서 '광장'과 '일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깊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상시적으로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말마다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주중의 힘든 일상을 개혁하기 위해서이고, 주중의 압박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것은 주말의 행동을 통해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 아닌가.
촛불정국으로 드러난 시민들의 자각과 엄중한 요구에 비해 경제시스템이나 재벌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실제 조건이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삼성물산 합병을 도왔던 보건복지부나 공정거래위원회가 보여주었듯 거대 경제권력에 포획된 정부와 관료, 재벌체제로부터 이득을 챙겨온 기득권세력과 이재용체제를 만든 공모자들의 조직적 반발이 그런 경우이다.
현재의 모습으로는 다가오는 대선에서 야권의 누가 승리를 하더라도 수구를 압도할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기 어렵다. 이는 새 정부가 개혁 작업을 힘있게 추진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며, 개혁 작업이 지지부진해질 경우 촛불혁명의 진전도 새로운 장벽에 직면하게 할 것이다. 당장 더 큰 문제는 야권이 분열된 상태에서 유력 정당과 후보가 대선 승리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하는 정치공학적 고려가 종종 기득권 세력에 타협적 태도를 취하게 만들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이다. 지난 총선 때처럼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라는 프레임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가장 대표적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지지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정치권이 자기네 후보를 결정하는 방식 자체가 촛불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시민들의 거대한 노력과 희생으로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치판 전체를 흔들어놓았는데 유독 정당들만은 87년체제가 만들어낸 틀 그대로 당내 경선을 치르고 그렇게 탄생한 서너명의 유력후보 중 하나를 옛날식 그대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제일 덜 싫은 후보라도 찍으라고 들이미는 것은 심지어 상도의(商道義)에도 어긋나는 일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의 일이다. 종종 듣던 진보 성향의 팟캐스트 방송을 들으며 길을 걷고 있었다. 그저 걷기의 지루함을 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순간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지나간 짧은 대화를 다시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노태우 시대 재평가해야죠. 노동자 실질임금이 매년 가파르게 상승하고, 복지도 확대되고, 남북교류의 물꼬도 트고." "맞아요. 재평가해야죠. 지금에 비하면 그때가 정말 좋았어요." 어떤 비판도 없이 노태우 시대가 그저 '좋았던 때'로 묘사되었다. 그것도 모든 출연자들의 절대적 동의와 함께.
결선투표의 도입이 위헌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선투표가 없는 상황이 위헌이란 점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 헌법은 위의 제3항에서 "대통령후보자가 1인일 때에는 그 득표수가 선거권자 총수의 3분의 1 이상이 아니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없다"고 규정한다. 대통령후보자가 1인인 상황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같은 조항을 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대통령의 지위와 권력이 너무나 크고 심대한 까닭에 대통령의 민주적 정당성은 '선거권자 총수의 3분의 1 이상'의 지지를 최소한으로 한다고 선언한 것이라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결선투표 없이 단순다수득표자를 당선자로 인정해왔던 지금까지의 선출방식에 따른 결과는 어떠한가?
2007년 대선에서 결정적으로 패한 이후 선거마다 거의 연전연패하면서 야당은 재집권 노력보다 원내 제2당의 알량한 기득권에 안주하는 습성이 생겼습니다. 87년체제 말기국면 특유의 이런 현상이 곧 한국판 양당 기득권구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수구세력은 제1야당에 나눠주는 먹이조차 점점 더 아까워지고 선거 때마다 표를 얻어야 하는 일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에 아예 87년체제를 자기들 식으로 끝내려는 작업을 속속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개혁적 진보에 관한 것들이다. 이는 유고집에도 자주 등장한다. 한국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지형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개혁과 수구의 구분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보-보수는 시장과 국가의 상대적 양의 관계에 관한 것이고, 개혁-수구는 시장과 국가의 질에 관한 문제다. 그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진보파가 꼭 개혁파는 아니다. 주사파는 북한 개혁개방에 반대하는 수구파이고,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특권 문제를 외면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재벌개혁을 외면하는 진보학자는 수구파에 해당하고, 새누리당의 소수 쇄신파는 오히려 개혁적 보수파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박근혜 대통령 자신의 임기연장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87년 6월항쟁의 최대 열매 가운데 하나인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최근 몇년간 착실히 축소되어왔다. 2012년 선거에서의 대대적인 관권개입과 불법행위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대부분 흐지부지되었고, 수사기관의 독립성, 관료조직의 중립성, 언론의 공정성 등 재발방지 장치들이 하나같이 멸종위기에 놓였다. 시민들이 집회와 시위를 통해 의사를 직접 표시할 기회는 극도로 억압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집권기간 동안 해온 일은 87년 헌법 안에 규정된 절차와 헌법기관들의 권한을 파괴하고 굴복시키는 일이었다. 그 전형적인 예가 검찰총장을 솎아내고 여당 원내대표를 찍어낸 일, 정당 해산과 국회의원 제명,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같은 것들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인 "심리전"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집회를 "소요"로 인식하는 것이 보여주듯이, 교통방해죄를 저지른 사람을 잡기 위해서 서울 시내에 2500명의 경찰을 배치하는 것이 보여주듯이 대통령은 지금 '내전'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내전의 심리가 쿠데타의 동기인데, 이제 그 창끝이 국회의장을 향하고 있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공직자들, 특히 자신을 민주주의자라고 자처하던 정치세력들, 인권의 제도화를 추구하던 장본인들이 왜 이렇게 차별의 공모자이자 행위자가 되고 있는가. 간단히 말해서, 이들은 보수개신교계와 등을 돌리고는 집권할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대형교회들이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한다는 몇만명의 서명을 받아와 흔들 때 그것을 선거 때 자신이 획득할 표로 계산한다. 이런 구조를 바꾸지 않고는 누가 집권하더라도 민주주의와 공공성을 갉아먹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데 일조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