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13구에 화염이 치솟았다
결국 좌파는 승리 속에서 패배했다.
섹스와 쾌락에 대해 국가가 개입하고 문란함과 건전함을 나누며, 문란해보이는 존재들을 선별하고 배제하는 것은, 그들을 동등한 시민이자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따라서 민주의 본의에 어긋난다. 설혹 문란한 감염인이 있다 해도 그 또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주인의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이 민주의 속뜻에 부합한다.
한국에서 대학은 미래의 유토피아를 선취하는 공간은커녕 가장 후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사회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초등학교 반장도 선거로 뽑는 시대에 지성인을 자처하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대표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비민주적인 조직이 한국 대학이고,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과 착취가 가장 자심하게 자행되는 곳이 한국 대학이며, 자본과 국가 권력에 굴종하며 일체의 비판정신과 변혁의식을 거세당한 곳이 한국 대학이다. 대학이 이처럼 남루한 흉물로 퇴락한 결과 한국 사회는 비판의 정신도, 정의의 언어도, 변혁의 전망도 상실한 절망사회로 추락했다.
많은 관객들이 영상 속 조문객의 오열을 보며 영화관이라는 장소성을 망각한 채 오열하는 자신을 마주한다. 이 순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애도는 특이하게도 떠나간 대상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분노와 슬픔으로 항의했음에도 억압당해온 가치들과, 선과 정의가 배반당하는 우리의 아픔에 오불관언했던 세력을 향해 있(었)다는 사실을. '촛불혁명'은 표면적으로는 정권교체로써 완수된 듯하지만 사실 감정은 정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두개의 애도가 완수되어야 마음 깊숙이 고인 멜랑꼴리와 결별하고 건강한 정치성을 회복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3기 민주정부'나 '2기 노무현 정부'가 아니라, 시민혁명이 잉태한 '1기 혁명정부'라는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지난 70년간 이 나라를 '기형국가'로 불구화한 강고한 기득권 체제를 혁파하는 것, 새로운 '정책'을 넘어 새로운 '체제'를 창출하는 것, 한국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전환시대의 선봉장이 되는 것- 이것이 문재인 정부에 부여된 시대적 과제다. 독일 현대사가 브란트 정부 이전과 이후로 나뉘듯, 문재인 정부도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분수령이 되길 기대한다.
내게는 문신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른쪽 팔에 쓰인 글귀가 무슨 뜻인지 물어왔고 나는 그때마다 비밀이라고 말했다. 실은 '현실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라고 쓰여 있다. 이 생각은 내게 참 소중했다. 내가 만난 많은 어른들은 정확히 그와 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 몽상가처럼 세상에 관한 따뜻하고 근사한 말을 늘어놓되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단 한치의 손해도 용납할 수 없다는 뜨거움으로 그를 믿어왔던 주변의 많은 이들을 집어삼켰다.
선생이 영면하신 뒤 누구는 선생의 글에서 배운 것이 없다고 밝혀서 논란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배우고 안 배우고는 그만의 자유다. 쟁점은 '배움'의 의미이다. 문학이론과 미학 등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나는 요즘 '이론'의 한계, 이론적 글쓰기의 한계를 느낀다. 이 한계는 선생이 보여준 에세이적 글쓰기의 의미와도 관련된다. 범박하게 말해 한국 사회가 '헬조선'이 된 것이 이론이 부족해서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과 이론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배운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각자의 삶을 바꾸고,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꾸는 그 무엇이 아닐까.
청년들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청년들이 불쌍하니 도와달라'는 식으로는 기성세대가 꿈쩍도 안 합니다. 저는 한국사회의 청년들이 '저출산 망국론'을 장착하고 이와 결합된 애국 담론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여 스스로를 구제하고 나라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한국의 진보정치 전체가 저출산 망국론과 반이민 산업구조 고도화 전략으로 무장하고 담론과 정책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출산 문제는 한국사회가 해결해야 할 첫번째 순위의 문제이자, 청년세대에게 극히 유리한 의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