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2020년 10월 26일 21시 00분 KST | 업데이트됨 2020년 10월 27일 10시 32분 KST

알고보면 더 재밌는 미국 대선 선거제도의 모든 것 : ③ 투표억압

[2020 미국 대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미국의 흑인 투표 억압

Mark Makela via Getty Images
조기투표에 참여한 한 흑인 유권자가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문구가 적힌 마스크를 쓰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주. 2020년 10월17일. 

편집자주 - 11월3일에 치러지는 미국 대선을 앞두고 관련 뉴스가 쏟아집니다만, 기사를 읽다 보면 조금은 생소한 용어들이 등장합니다. 선거인단, 우편투표, 투표억압 같은 것들이죠.

한국과 똑같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미국 선거제도는 약간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한국과는 조금 다른 미국의 선거제도를 허프포스트가 쉽게 설명해드립니다. ✍️

 

선거인단 (Electoral College)

우편투표 (Mail-in Voting)

③ 투표억압 (Voter Suppression)

 

투표억압(Voter Suppression) : 흑인은 투표소에서 7시간45분 기다린 거 실화? 🤯

미국에서 투표억압(Voter Suppression)은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법과 제도를 뜻합니다. 미국의 선거제도 중 다른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 아마도 투표억압일 겁니다. ‘투표‘와 ‘억압’은 그다지 잘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고, 한국은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동네마다 투표소가 몇 개씩 있는 국가니까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권자들의 투표를 억압하다니요...? 😕

투표억압이 미국에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미국의 투표억압은 그 역사가 꽤나 깊다고 할 수 있죠. 제목에서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흑인을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노예제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투표억압은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이뤄지며, 엄밀히 말해서 단일한 하나의 ‘제도’는 아닙니다. 주(州)나 지역 정부마다 그 양상이 조금씩 다르고요, 선거 때마다 달라지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투표억압 중 하나는 투표소 폐쇄입니다. 미국에서는 각 지역 정부가 자기 지역의 선거 사무를 담당하는데, 어떤 지역에서는 투표소 개수가 자꾸 줄어듭니다. 특히 흑인 인구 비율이 높은 곳에서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투표소 개수가 자꾸 줄어들면 어떻게 될까요? 투표소는 집에서 점점 멀어질 거고, 투표소는 더 혼잡해질 겁니다. 투표 의지는 그만큼 꺾이게 되겠죠.

미국의 투표억압을 설명한 뉴욕타임스(NYT) 영상에는 조지아주 펄튼카운티에서 조기투표에 참여했다는 한 흑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투표를 위해 무려 7시간45분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 반면 백인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지역의 투표소는 무척 한산한 모습을 보이죠.

투표억압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선뜻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ASSOCIATED PRESS
조기투표에 참여한 유권자들이 투표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더럼, 노스캐롤라이나주. 2020년 10월15일.

 

주민등록증 없는 미국에서 ”투표 하기 전에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

미국에는 한국의 주민등록증처럼 전 국민에게 일괄적으로 발급되는 신분증이 없습니다. 지문을 등록하지도 않죠. 그래서 미국에서는 투표자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지역마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이 때 특정 인종에게 불리한 규정들이 도입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흔히 ‘유권자 신분증 법(voter ID law)’이라고 불리는 규정이 대표적입니다. 

2005년에 미국에서 가장 엄격한 신분증 규정을 법으로 통과시킨 인디애나주의 사례를 보죠. 인디애나주에서는 투표소에 갈 때 사진이 포함된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합니다. 신분증이 없으면 일단 잠정투표(provisional ballot)를 한 다음에 10일 내로 신분증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효표가 되고 맙니다.

미국에서도 운전면허증이나 여권이 신분증의 기능을 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운전면허증이나 여권을 발급 받는 건 아닙니다. 브레넌센터에 따르면, 투표 참여 자격이 되는 미국인 중에서 정부가 발급한 사진 신분증이 없는 사람의 비율은 흑인의 경우 25%에 달합니다. 반면 백인은 8%에 불과하죠.

텍사스주의 경우 총기소지허가증은 유권자 확인용 신분증으로 인정하지만 대학교 학생증은 인정하지 않는 법을 시행합니다. 그런데 텍사스주에서 총기소지허가증을 발급 받은 사람의 80% 이상이 백인이고, 텍사스주 대학생의 50% 이상은 소수인종입니다.

그런가 하면 앨라배마주는 흑인 등 소수인종이 많이 사는 지역을 위주로 운전면허 발급 사무소 34곳의 문을 닫았다가 연방정부의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적자 때문이라고는 했지만, 이 지역 주민들은 신분증 발급이 어려워진 거죠. 패턴이 보이시나요? 🔎

이런 엄격한 법을 통과시킨 곳은 대부분 공화당이 주 의회를 장악한 곳들입니다. 이들은 부정 투표(voter fraud)를 막기 위해 엄격하게 신분을 확인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법들은 흑인과 라티노 등 소수인종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되어 이들의 투표 참여를 제한하는 효과를 내는 게 현실이죠.

 

ASSOCIATED PRESS
조기투표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유권자들. 채터누가, 테네시주. 2020년 10월14일. 

 

투표소 폐쇄 : 투표소가 점점 집에서 멀어진다...? 🗳️

앞에서 흑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서는 투표소 대기시간이 백인 동네보다 훨씬 더 길다고 설명드렸는데요. 그 얘기를 조금 더 자세히 해볼게요.

올해 초 영국 언론 가디언이 소개한 내용인데요. 시민권단체 ‘리더십컨퍼런스에듀케이션펀드’ 조사 결과 2012년부터 2018년까지 미국 전역에서 1688개의 투표소가 폐쇄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텍사스주에서 가장 많은 투표소가 사라졌는데, 없어진 투표소가 750개나 됐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텍사스주에 인구 약 25만명인 맥레넌카운티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이곳에서는 투표소의 44%가 줄어들었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인구가 1만5000명이나 늘어났는데도 말이죠. (늘어난 인구의 3분의 2는 흑인과 라티노였습니다.) 📊

휴스턴대학이 연구를 해봤더니 라티노가 많이 사는 동네에서 더 많은 투표소가 폐쇄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라틴계 미국인들은 투표를 하기 위해 백인보다 훨씬 더 먼 거리를 가야 한다는 얘깁니다.

가디언이 자료를 분석해봤더니 흑인과 라티노 인구 유입이 늘어난 50개 카운티에서 이 기간 동안 폐쇄된 투표소는 542개였습니다. 반면 흑인이나 라티노 인구 유입이 가장 낮은 50개 카운티에서는 사라진 투표소가 34개에 불과했습니다.

고개를 더 갸웃거리게 만드는 건 따로 있습니다. 이 지역들에서 늘어난 인구를 따져봤더니 앞의 50개 카운티에서는 총 250만명이 늘어난 반면, 뒤의 50개 카운티에서는 인구가 1만3000명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구가 더 많이 늘어난 지역에서 훨씬 더 많은 투표소가 없어졌다는 겁니다. 인구가 더 늘어난 지역에 투표소를 더 많이 늘리는 게 상식적일 텐데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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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미국 대선은 코로나19 여파로 우편투표와 조기투표에 참여하는 유권자들이 급증했다.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주. 2020년 10월19일.

 

집과 투표소의 거리가 투표율에 미치는 영향 🚗

2020년 선거에서는 훨씬 더 많은 투표소가 사라질 예정입니다.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우려로 우편투표의 비중이 ‘역대급’으로 높아질 것을 예상해 현장투표소를 줄이는 지역이 많기 때문이죠.

최근 인터넷매체 바이스(VICE)가 50개주와 워싱턴DC 정부로부터 확보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도했는데요. 2016년 선거 때와 비교해 올해 선거에서는 투표소가 2만818곳이나 줄어들 예정입니다. 2016년에는 4년 전에 비해 3000여곳 줄어드는 데 그쳤다(?)고 이 매체는 집계했는데요, 그것과 비교하면 꽤 큰 변화입니다.

집과 투표소의 거리는 꽤 중요합니다. 투표소가 가까워야 투표를 더 쉽게 할 테니 결과적으로 투표율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는 게 이미 다수의 연구에서 입증됐죠. 미국에서는 선거일이 공휴일이 아닌 주가 훨씬 더 많아서 출근을 하는 노동자들이 많은데요. 투표소가 멀어지면 근무 중에 잠깐 나와서 투표를 하기도 어렵습니다.

또 걸어서 쉽게 투표소에 갈 수 있는 지역과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 정도로 투표소가 먼 지역 중에서 어떤 곳의 투표율이 더 높을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더군다나 대중교통은 코로나19 감염 위험도 있고요. 자가용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도 투표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버드대와 보스턴대 연구진이 미시간주 유권자들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차량을 이용할 수 있는 유권자의 66%는 2018년 중간선거에 참여한 반면, 그렇지 못한 유권자 중 투표에 참여한 사람은 36%에 그쳤습니다. 또 백인 등록 유권자 중에서 자가용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8%에 불과했는데 흑인 등록 유권자 중에서는 그 비율이 25%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각 지역의 선거 당국은 인구 변화, 접근성 등을 고려해 투표소 운영 여부를 결정합니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 사라진 투표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불순한 의도’가 담긴 투표소 폐쇄와 그렇지 않은 사례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특히 겉으로는 누가 봐도 합리적인 이유를 내세우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겠죠.

일례로 트럼프 정부의 법무부(검찰)는 지난 4년 동안 장애인보호법(ADA)을 23번이나 활용해 결과적으로 100개 넘는 투표소의 문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이 법은 직장이나 학교, 대중교통, 건물 등에서 장애인의 접근권을 보장하지 않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데, 이 법을 투표소에 이례적으로 적용한 겁니다.

바이스 보도에 따르면, 그 전까지 10년 동안에는 법무부가 투표소의 장애인 접근권을 문제 삼은 게 1년에 1건 꼴에 불과했습니다. 2006년 전까지는 법무부가 이 법을 투표소에 적용해 문제 삼은 사례가 기록된 게 0건이었고요.

트럼프 정부의 법무부가 문제 삼은 투표소 중에서는 경사로 설치나 대체 출입구 마련 등으로 시설을 보완한 곳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투표소 103곳은 결국 운영을 중단해야만 했습니다.

 

Jessica McGowan via Getty Images
조기투표 첫 날, 투표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유권자들. 애틀랜타, 조지아주. 2020년 10월12일.

 

보터 케이징 : 선거인명부에서 내 이름이 삭제됐다고? 🗃️

또 하나의 대표적인 투표억압 수단 중에는 ‘보터 케이징(Voter Caging)’이라는 게 있습니다. 특정 유권자 집단의 투표 자격을 박탈하려는 목적으로 등록된 유권자의 자격을 문제 삼는 행위를 통칭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선거인명부(voter rolls)상 등록 유권자들에게 우편을 발송한 다음,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되는 것들을 모아서(‘케이징 리스트’) 해당 유권자의 유권자 등록을 취소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등록된 주소에 거주하고 있지 않으므로 적법한 유권자가 아니라면서 말이죠. (미국의 많은 주에서는 제3자가 타인의 유권자 자격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지역의 선거 당국이 선거를 앞두고 선거인명부를 업데이트 한다면서 비슷한 방법으로 유권자들의 이름을 삭제하는 ‘보터 퍼징(Voter Purging)’도 큰 틀에서 보터 케이징 수법 중 하나입니다.

언뜻 매우 정상적인 선거사무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우편물이 반송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

미국에서는 보터 케이징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특정 유권자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데 악용되어 왔던 것으로도 악명이 높습니다. 1960년대에 공화당이 ‘남부 전략’의 일환으로 민주당 지지층이 많은 흑인 유권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우편물을 발송한 게 본격적인 보터 케이징의 시초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방법(유권자등록법, NVRA 1993)은 이런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유권자가 명확한 의사를 표했거나 동의한 게 아니라면 지역 선거 당국이 마음대로 유권자 이름을 선거인명부에서 삭제할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

그러나 정말 ‘순수하게’ 유권자의 투표자격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용도라면 이런 식의 선거인명부 삭제 행위가 적법하다고 인정되기도 합니다.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게 문제죠.

오하이오주가 시행한 유권자등록법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오하이오주는 ‘선거인명부 관리’ 차원에서 2년 동안 투표를 하지 않은 유권자에게 확인 우편물을 발송해왔습니다. 만약 여기에 회신을 하지 않고, 이어지는 4년 동안에도 투표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 유권자의 이름을 선거인명부에서 삭제하는 것이죠. 

이 법이 흑인과 라티노 등 소수인종에게 차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소송이 제기됐고, 항소심은 이 법이 NVRA에 위배된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2018년 연방대법원은 하급심의 판결을 뒤집고 이 법이 적법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판결은 정확히 보수 성향 대법관 5명의 찬성과 진보 성향 대법관 4명의 반대로 엇갈렸습니다.

 

ASSOCIATED PRESS
조기투표 투표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유권자들. 리처드슨, 텍사스주. 2020년 10월13일.

 

2013년 연방대법원 판결 이후 투표억압이 급증한 이유 ⚖️

1965년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미국 민주주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법입니다. 남북전쟁(1861-1865년) 당시 노예제를 지키려 했던 남부 지역에서는 그 전까지만 해도 흑인들의 투표 참여를 제한하는 다양한 법률들이 시행되고 있었는데, 1960년대 불 붙었던 흑인 민권운동의 성과로 마침내 투표에 관한 인종차별을 금지한 법이 탄생한 겁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48년 뒤인 2013년, 연방대법원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각 지역 정부가 선거 관련 제도를 변경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연방정부의 사전 승인(preclearance)을 받도록 한 규정에 대해 ‘위헌’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역시 보수 성향 대법관 5명의 찬성과 진보 성향 대법관 4명의 반대로 판결이 엇갈렸습니다.

당시 연방대법원은 투표권에 있어서 더 이상 흑백 차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조항이 필요하지 않은 데도 여전히 각 주 정부에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있으며, 주 정부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헌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소수의견에서 분노 섞인 강한 어조로 이 결정을 비판한 사례는 유명합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젊은층 사이에서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된 계기이기도 하고요.)

연방대법원의 이 결정 이후, 미국 각지에서는 투표억압을 위한 다양한 법과 제도가 새로 도입됐습니다. 판결 몇 시간 만에 법을 통과시킨 지역도 있을 정도였죠.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투표소 폐쇄나 엄격한 신분증법 시행, 보터 퍼징 등이 (거의 모두 공화당에 의해) 노골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겁니다.

올해 미국 대선은 코로나19에 더해 이런 다양하고도 더욱 광범위한 각종 투표억압 시도 속에서 치러지게 됩니다. 과연 미국인들의 뜻은 선거에 제대로 반영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