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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의 기억, 구원의 희망 – 중국 마을에서

  • 강병진
  • 입력 2015.11.28 06:15
  • 수정 2015.11.28 06:37

중국 야오유 마을(YAOYU VILLAGE, China) – 리우 렌왕(Liu Renwang)에게 자신이 자란 마을은 집인 동시에 지옥이다. 현재 그는 37년 전, 10대였던 그가 건축을 도왔던 1층 벽돌집에 산다. 집 주위 뜰에서는 옥수수 껍질이 말라가고 친구들이 장기를 둔다.

뜰 문을 나선 리우는 왼쪽으로 돌아 30미터 정도 마을길을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저거야. 그들이 그렇게 했던 호텔이 저거야.” 리우는 마을 앞 고속도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리우가 말한 ‘그들’이란 지역 경찰 7명이다. ‘그렇게 했다’는 건 수갑을 채워 천장에 매달고 때리고, 작은 금속 우리에 쪼그려 앉아 있는 그에게 끓는 물을 끼얹고, 힐 달린 부츠로 그의 머리를 때려 단기 기억이 사라지게까지 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

중국 야오유 마을의 리우 렌왕

리우는 7년 전에 체포됐다. 지역 공무원을 죽였다고 자백할 때까지 고문 당했다. 5년을 복역한 뒤, 고문을 사용해 얻은 증거를 배제한다는 새로운 법이 생겨 유죄 판결이 뒤집혔다. 풀려난 뒤 리우는 지역 화가에게 경찰이 사용한 고문법을 자세히 묘사한 그림들을 그리게 했다. 이 그림들이 중국 매체에 실렸고 세상이 알게됐다.

중국 사법 체계의 여러 가지 단점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고문을 통해 내려지는 잘못된 판결일 것이다. 수사 기술은 빈약한데 모든 범죄를 해결하라는 압력은 거세기 때문에, 경찰들은 자백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아주 고통스러운 고문을 자주 사용한다.

지난 여러 해 동안 거짓 자백과 잘못된 판결 이야기가 중국을 괴롭혔다. 몇몇 으스스한 사건들의 경우, 유죄 판결을 받은 ‘살인자들’이 고문과 몇 년 동안의 수감 생활을 견디고 나자 그들이 죽였다는 ‘피해자들’이 살아 있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한 지방 판사는 범죄 사건 판결이 잘못된 경우는 거의 전부 고문을 통해 얻은 거짓 자백 때문이라고 최근 말했다.

리우는 경찰이 자신에게 사용한 여러 가지 고문 방법을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그리게 했다.

리우의 시련은 중국 사법 체계의 가장 무시무시한 면을 잘 보여주고, 그가 풀려났다는 것은 시진핑 주석이 이끄는 전면적인 사법 개혁의 밝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고 심문 중 고문의 사용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시진핑과 이전의 중국 지도자들은 심문 과정에서 용의자들을 보호하고 고문으로 얻은 증거는 사용하지 않도록 형법을 개정했다. 새 파일럿 프로그램은 지방 정부 공무원들이 판사와 평결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끊으려 하고 있다. 올해 중국 정부는 수사와 재판을 왜곡시키는 체포 및 유죄 할당 제도를 철폐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개혁은 최악의 학대를 막고 사법 체계에 대한 대중의 믿음을 쌓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나는 사법 개혁에 대해 전반적으로 낙관적이지는 않은데, '잘못된 판결에 대한 개혁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들긴 한다. 다른 부정적인 일들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 사건들에서 의미있는 긍정적 변화를 만들 수 있는가?” US-아시아 법률 연구소의 아이라 벨킨 소장이 말했다.

리우의 집에 가족 사진이 걸려있다.

지금도 ‘부정적인 일들’은 넘쳐 난다. 인권 변호사들에 대한 강경한 탄압, 정부를 거스른 사람들의 수치스러운 ‘자백’ 방송, 페미니스트부터 환경 운동가까지 여러 풀뿌리 운동가들의 체포나 협박까지 다양하다. 광범위한 강도 높은 탄압 때문에 정부 과잉을 제한하고 시민들에게 힘을 주려던 중국 시민 사회가 상처를 받았다고 학자와 활동가들은 말한다.

중국식 법치에 대한 시진핑의 비전은 리우의 석방과 이 활동가들의 체포 사이 어딘가에 있다. 평범한 범죄로 기소된 평범한 시민들에겐 효율적이고 규칙에 의거한 시스템이지만, 중국 공산당의 권력에 도전하는 풀뿌리 운동에게는 조금도 관용을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다.

사회적 불안의 두 가지 불꽃인 노골적 오심, 노골적 오심을 널리 알리는 활동가를 질식시키려는 모델이다. 그러나 중국의 넓게 뻗은 사법 및 경찰 관료제의 엄청난 크기를 생각할 때, 시진핑의 상의하달식 개혁에는 큰 장애물이 있다. 모든 풀뿌리 참여를 진압하는 고도로 중앙화된 시스템이 중국처럼 드넓은 나라의 시골 마을들에 있는 우중충한 취조실들을 감시하는 게 가능할까?

가족들의 오래된 집 밖에서 대추를 줍는 리우와 아들

야오유 마을은 중국 황토 고원의 노란 절벽을 파서 만든 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1963년에 태어난 리우는 아홉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는 먹을 것이 부족했다. 수입과 결혼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리우는 19세 때부터 탄광에서 하루에 10시간씩 일했다.

중국의 산업 호황 때문에 석탄 수요가 급증했고, 탄광은 농장 노동보다 수입이 좋았다. 탄광에서 일한지 15년 뒤, 리우에겐 아내, 세 아이, 트럭을 살 돈이 있었다. 그는 형제와 함께 트럭으로 철광석과 석탄을 날랐다.

“그때 우린 부자는 아니었지만, 우리 가족한테 필요한 건 기본적으로 구할 수 있었지. 난 우리가 잘 지낸다고 생각했어.” 리우의 회상이다.

그런 경제적 상황 개선은 2008년 겨울에 무너져 내렸다. 12월 10일 해 뜨기 전 새벽에 지역 공무원이 자기 집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마을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둔 때였고, 경찰은 사건을 해결하라는 강한 압력을 받았다.

야오유 마을의 자기 집에 있는 리우. 2008년의 살인 때문에 그는 이 마을에서 체포되어 고문 당했다.

리우는 첫날 심문 받고 풀려난 30명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형제는 요주의 인물로 구류되었다. 그는 선거에서 피해자와 경쟁하는 후보 중 하나였고, 피해자는 사업 문제로 싸우다 리우의 형제를 칼로 벤 적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초동 수사가 끝나고 며칠 뒤, 경찰이 리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게 물어 볼 게 있다고 하더라고. 저녁을 먹고 경찰소로 갔지. 그랬다가 돌아오지 못했어. 5년 동안.” 리우가 월드포스트에 말했다.

도착하자마자 경찰은 리우를 ‘호랑이 의자’라는 특수 의자에 앉히고 손발에 족쇄를 채웠다. 경찰들은 돌아가며 이틀 내내 그를 심문했다. 졸기 시작하면 머리를 때렸다. 그래도 자백을 하지 않자, 수갑으로 천장 난방 파이프에 매달았다. 그가 의식을 잃을 때까지 매달아 두었다가 발가락이 겨우 닿을 수 있게 바닥에 벽돌을 놓았다. 의식을 차리면 벽돌을 치웠다. 그는 10일 동안 자지 못했다고 한다.

“유치장에 돌아갈 때면 입이 언제나 비뚤어져 있었어. 완전히 기형이 되었지.”

리우는 자신에게 사용한 고문 기술들을 지역 화가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이 그림이 매체의 관심을 끌어 자신의 시련에 대한 배상을 받는데 도움이 되길 원했다.

그 다음에는 그의 코 안에 끓는 커피를 붓고, 전기가 흐르는 배턴을 목에 대고, 작은 금속 우리 안에 쪼그려 앉게 했다. 리우의 손을 앞쪽에 족쇄로 채우고, 머리는 위의 구멍 밖으로 빼놓게 해 그의 체중이 목에 걸렸다. 경찰들은 돌아가며 다양한 방법으로 고문하면서 심문했다. 쇠로 된 줄을 손톱 밑에 쑤셔 넣고, 머리에 끓는 물을 붓고, 구타했다. 씻고 또 반복했다.

리우의 첫 변호사가 리우를 만나러 베이징에서 왔을 때, 그는 교도소에서 문전박대 당했다.

“그들은 변호사에게 ‘여긴 중양현이야, 수도가 아니야. 네가 만나고 싶으면 아무 때나 볼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선 넌 그럴 권리가 없어’라고 했어.” 리우의 말이다.

중양 현청과 리우의 변호사 두 명은 이번 기사 관련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러나 리우의 첫 변호사가 2008년에 쓴 블로그 포스트를 보면 교도소에서 리우를 만나는 것을 금지 당한 이야기가 나온다. 리우가 주장하는 고문 수법은 중국 언론 보도와 인권 단체 보고서에 나온 몇 가지 사례들과 일치한다.

몇 주가 지나자 리우는 고통, 혼란, 분노가 쌓이고 쌓여 머리가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그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자백했다. 공범과 함께 저질렀다. 혼자 저질렀다. 오토바이를 타고 떠났다. 오토바이가 없다. 고문을 멈추기 위해 무슨 말이든 했다.

10가지 이상의 다른 자백을 하자 57일 후에 고문이 멈추었다.

수사가 끝난 뒤의 리우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망가져 있었지만, 정의가 이루어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판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하면 곧 풀려날 거라고 감방 동료들에게 말했다.

리우는 ‘유죄, 사형 유예’라는 말을 듣고서야 현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다 같은 입으로 숨을 쉬어. 경찰이 실수를 해도, 검사는 정정하지 않아. 검사가 실수를 해도 법정에서 정정하지 않아. 전부 다 그냥 같은 용 한 마리야.”

야오유 마을은 중국 중부 탄광 지대의 한가운데에 있다.

시진핑의 사법 개혁은 그 용을 쪼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국의 법정은 전통적으로 정치와 안보 기구의 톱니바퀴였다. 자금은 지역 공무원에, 수사는 경찰에 의존했다. 판사들은 권력을 사용해 자기 사촌의 공장을 보호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가리는 지역 공무원들 앞에 속수무책일 때가 많았다.

이런 지역 토호들을 꺾으려면 공무원들에게서 자금력을 빼앗아야 한다. 법정의 자금 지급처를 성 단위로 올리고, 정치적 경계를 넘나드는 순회 재판소를 만드는 개혁 조치가 실험 중에 있다. 법률 전문가들은 재정과 관리의 중앙화는 지역 공무원들의 변덕에서 법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올해 5월에 정부는 지역 당국이 소송 사건을 취하할 수 있는 권한을 빼앗았다. 그 결과 정부 행동에 대한 시민들의 소송이 221% 늘었다.

시진핑과 예전 지도자들은 고문을 겨냥한 개혁도 도입했다. 주요 사건의 심문은 이론적으로는 반드시 동영상으로 촬영해야 하며, ‘배제의 원칙’을 새로 의무화해서 고문을 통해 얻은 증거는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시진핑 치하에서 임명된 판사들은 잘못된 판결과 고문 문제에 대해 공공연히 목소리를 냈다. 정확한 숫자를 알기는 힘들지만, 학자들은 법원이 과거의 잘못된 판결들을 뒤엎으려는 노력을 가속화하여, 2014년에 최소 1,317건을 재심했다고 한다.

리우와 가족들은 그가 10대 때 건축을 도왔던 버려진 학교 건물에 산다.

시진핑은 ‘대중들이 모든 사건에서 공정함과 정의를 받는다고 느끼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게 목표라고 한다. 벅찬 일이지만, 시진핑과 학자들은 공산당의 생존에 있어 결정적인 일이라고 한다.

‘사법 개혁의 목적인 차이나 드림과 당에 새 생명에 불어넣기의 성공은 이 사법 개혁을 통해 대중이 자신들이 원하는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느끼게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국제 인권 감시 기구의 연구자 마야 왕의 말이다.

아직 성공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초기 결과들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국제 인권 감시 기구의 연구에 의하면 고문 금지 조치가 시행된 지 2년이 지났지만, 경찰과 판사들은 대부분의 규정들을 피해 갔거나 아예 무시했다. 고문 혐의가 있는 432건의 형사 평결 중 증거가 제외된 사례는 거의 없었고 무혐의로 풀려난 피고는 하나도 없었다. 최근 국제 앰네스티의 연구도 거의 같은 결론을 냈다. 고문은 여전히 널리 퍼져 있고, 인권 변호사도 타겟이 된다.

포드햄 법대에서 중국 법률과 거버넌스를 연구하는 칼 민즈너는 이런 문제들은 당이 독점적으로 감독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진정한 제도적 변화에는 유기적 진화가 있어야 한다. 유기적 진화는 상의하달식 정책 변경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 시스템 제일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유 공간을 만들어 줘야 이 새로운 수단들을 사용하기 시작할 수 있다.” 민즈너가 월드포스트에 말했다.

고문에 관한 책을 저술하고 있는 헤 지아홍 교수는 이 문제는 제도적이며 교육적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중국 외딴 곳의 경찰과 판사들을 규제하고 재훈련해야 한다. 용의자를 무조건 두들겨 패는 방법 외의 수사 능력을 익혀야 할 경찰들이 수십만 명이다. 유죄 판결 확률이 99.9%인 것에 익숙해진 피고측 변호인들은 자신의 의뢰인을 보호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수십 년간 검사의 문서에 도장만 찍어온 판사들은 경찰의 결론에 도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규정이 종이에 법제상으로만 존재하면, 몇 년을 기다려야 풀뿌리 수준에서 실행된다. 중국은 거대한 나라라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헤 교수의 말이다.

리우가 자기가 자란 동굴 집 앞에서 모은 대추를 권한다.

리우 렌왕의 정의는 5년 후에 이루어졌다. 그는 그 시간의 대부분을 발과 다리에 수갑을 찬 채 공동 감방에서 보냈다. 교도소의 유일한 소일거리는 카드 놀이였지만, 구타의 후유증으로 그는 낄 수 없었다. 자기 차례가 돌아왔을 때 리우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플레이를 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 동안 리우의 두 번째 변호사가 중국이 새로 도입한 배제의 법칙을 이용해 리우가 고문을 받아 했던 자백들을 증거에서 제외시켰다. 자백이 빠지자 검사의 기소는 무너졌고, 리우는 2013년 12월 27일에 풀려났다.

“사람이 교도소에서 빠져나오면 기분이 좋아야 되는 거잖아. 그런데 나는 마음이 무겁고 우울하더라고.” 리우가 월드포스트에 말했다.

집에 오는 차 안에서 그는 참을 수가 없어 30분 동안 흐느꼈다. 아내와 아들이 옆에서 그를 달랬다.

리우가 배상 신청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리우의 아내는 빨래를 해서 돈을 번다.

리우가 없는 동안, 그가 태어날 때부터 살던 동굴 집이 무너졌다. 그는 10대 때 건축을 도왔던 버려진 학교 건물로 가족과 함께 이사했고, 현재 그의 아내는 이웃 마을에서 빨래를 해 돈을 번다. 리우의 기억력과 신체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다. 그는 일할 수가 없다고 하며, 아직 받지 못한 정부 배상금을 신청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는 가능할 때면 언제나 자신이 자란 마을 밖에 있으려고 한다. 그는 시선들, 자기에게 등을 돌렸던 사람들, 그가 고문 받았던 먼 곳의 호텔을 증오한다.

리우는 시진핑의 사법 개혁 덕택이라고 하며, 상의하달 개혁과 투명성 강화가 아니었다면 자기는 아직도 감옥에 있었을 거라 말한다. 하지만 마을에서 그의 아내를 보고 있으면, 그리고 석방된 지 2년이 지났는데 아직 아무 배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는 믿지 않는다고 한다.

“내 목숨이 다른 사람 손에 달린 거야. 그들이 넌 들어간다,라고 하면 넌 들어가는 거야. 그들이 너 나간다고 하면 그 말대로 되고.”

아내와 아들과 함께 선 리우. 야오유 마을의 그들의 집 앞이다.

 

허핑턴포스트US의 Memories Of Torture And Hope For Redemption In A Chinese Village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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