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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문 200장 써라"...반말·욕설에 성희롱까지

한 시중은행 고객 ㄱ씨는 본인이 대출을 받은 상품 6개의 금리 변동 상황을 날마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은행 직원이 ‘금리 알림’ 서비스는 없다고 설명했지만, ㄱ씨는 “무릎을 꿇고 빌어라”, “은행장이 사과하라”는 황당한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본점 소비자보호부 직원이 집으로 찾아가서 사과했지만, ㄱ씨는 “담당직원이 손글씨로 사과문 200장을 써라. 은행장도 별도로 사과문을 쓴 뒤 직인을 찍어 공증을 받아서 보내달라”는 막무가내식 요구를 계속했다.(공개사과요구형)

또다른 은행 고객 ㄴ씨는 창구 직원에게 현금 입금을 요구한 뒤 “(입금액이) 300만원이 넘어야 하는데 왜 그만큼 되지 않느냐”며 화를 냈다. 지폐를 세는 기계의 저장장치를 확인해 “입금 의뢰한 금액은 200만원이 맞다”고 확인해줬지만, ㄴ씨는 “왜 이제서야 이야기를 하느냐”며 들고 있던 신문을 말아 직원의 가슴과 배를 찔렀다.(폭력행사형)

공과금을 내러 은행을 찾은 고객 ㄷ씨는 본인이 속옷 사업을 한다고 소개했다. 이후 ㄷ씨는 “브래지어는 뭘 입었느냐”, “가슴이 작아 보이는데 커보이는 제품을 입어야겠다”는 따위의 성적 농담을 이어갔다.(성희롱유형)

전국은행연합회가 지난 1월에 낸 ‘문제행동 소비자 응대가이드’를 보면, 이런 류의 이른바 ‘진상고객’들이 실제 사례로 등장한다. 은행 직원은 고객의 반말과 욕설, 부당한 요구가 있어도 감정을 숨기고 무심결에 허리를 굽히게 된다. 한 시중은행 영업점 직원은 “민원이 들어오면 영업점 평가에 반영된다. 자신의 인사평가 불이익뿐만 아니라 영업점의 다른 직원들에게도 피해를 주기 때문에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민원인을 달래야 한다”고 털어놨다.

그동안 금융당국이 진행해온 ‘민원발생평가’가 ‘악성 민원’을 제대로 걸러내지 않은 채, 민원발생 및 처리 건수만 반영해 ‘좋은 은행’, ‘나쁜 은행’을 가려낸 점도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은행들이 민원 발생 자체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어서 상대적으로 ‘직원 보호’에 소홀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탓이다.

실제로 은행 직원들은 ‘악성 민원’으로 인한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지만 회사로부터 마땅한 구제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2월 정혜자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낸 ‘감정노동 실태조사’(은행원 3776명 대상 설문·복수응답) 결과를 보면, 전체 응답자의 75.6%는 직장 내 스트레스 원인으로 ‘악성민원 응대’를 꼽았다. 응답자 90%는 ‘말꼬투리 잡기나 인격무시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민원전담부서 직원의 경우 27.8%가 실제 우울증을 앓거나 진단받았던 것으로 집계됐다. 악성 민원이 발생했을 때 회사가 취한 조처로는 ‘아무런 도움이 없다’(52.2%)와 ‘말로 위로’(45.8%)가 가장 많았고, 오히려 ‘공개적으로 (고객에게) 사과하도록 지시’(24.4%)하는 경우도 적잖았다.

이에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기식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고객을 응대하는 근로자를 보호하도록 사용자에게 법적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이번주중 발의하기로 했다.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사업장은 모두 해당된다. 금융권은 은행법, 상호저축은행법, 보험업법, 여신전문금융업법,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별도로 발의할 계획이다.

법 개정안은 “사용자는 고객을 직접 응대하는 근로자가 요청하면 해당 악성 민원인을 상대하지 않도록 담당자를 교체해야 한다”거나 “사용자는 고객의 폭언이나 성희롱, 폭행을 당한 근로자에게 치료·상담을 지원해야 한다. 고객을 응대하는 근로자를 위한 상시적 고충처리기구도 설치해야 한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김 의원은 “대다수 감정노동자가 여성인 점을 감안하면 성희롱과 폭언 등의 문제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는 것은 인권보호 차원에서도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 시중은행 홍보담당 직원은 “최근 영업점에서 악성 민원이 늘고 있어, 긍정적으로 검토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다만 민사상 손해배상청구소송 등 비용부담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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