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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하기 지겨운 세상

지난해 9월 영국 재무부는 '새로운 1파운드 동전 디자인 공모전'이란 특별한 공모전을 공표했다. 총 6,000여 점이 접수되는 열기 속에 지난 3월 18일 수상작이 발표됐다. 대중의 관심을 끈 점은 미래의 1파운드 동전 디자인이 청소년의 손끝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15세의 소년, 데이비드 피어스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그리고 북아일랜드까지 영국이란 나라를 지탱하는 네 지역을 조화롭게 묶기 위해 각 지역의 상징 식물을 디자인의 주 요소로 차용했다. 그런데 만일 비슷한 동전 공모전이 우리나라에서 진행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 전종현
  • 입력 2015.04.14 11:40
  • 수정 2015.06.14 14:12
ⓒ전종현

지난해 9월 영국 재무부는 '새로운 1파운드 동전 디자인 공모전 (New £1 Coin Design Competition)'이란 특별한 공모전을 공표했다. 1983년 이래 30년 동안 변화 없이 유통된 터라 불량 주화의 온상이 된 1파운드 동전을 오는 2017년 새롭게 발행하려는 계획을 세우던 중 실제 사용하는 시민들에게 동전의 새로운 디자인을 공모해 홍보도 하고 시민 참여도 높이려는 참신한 시도였다. 특히 1파운드는 영국 화폐 중 가장 범용적으로 쓰이는 만큼 자신의 디자인이 채택된다는 것은 상금이 주는 물질적인 매력과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다. 총 6,000여 점이 접수되는 열기 속에 지난 3월 18일 수상작이 발표됐다. 대중의 관심을 끈 점은 미래의 1파운드 동전 디자인이 청소년의 손끝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 The Royal Mint

15세의 소년, 데이비드 피어스(David Pearce)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그리고 북아일랜드까지 영국이란 나라를 지탱하는 네 지역을 조화롭게 묶기 위해 각 지역의 상징 식물을 디자인의 주 요소로 차용했다. 잉글랜드의 장미, 스코틀랜드의 엉겅퀴, 웨일스의 리크(leek),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토끼풀은 동일한 줄기를 공유하며 수수한 왕관의 보호 아래 각자의 생명력을 피워낸다. 왕실 아래 통합되는 영국의 이미지를 노골적이지 않고 세련된 콘셉트로 풀어낸 디자인은 고유의 그림체를 유지하며 화폐 디자이너와 전문 레터러의 후처리를 거쳤고 내후년부터 공식적으로 시장에 풀릴 예정이다. 그런데 만일 비슷한 동전 공모전이 우리나라에서 진행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가장 먼저 예상되는 것은 내부 스크리닝이다. 외부 전문가가 오면 좋겠지만, 그러면 따로 심사 무대를 마련해야 하고 거마비도 드니 한국조폐공사가 수십 년간 쌓은 전문성의 이름으로 동전에 쓰일 만한 디자인을 먼저 걸러낼 것이다. 이 때 피어스처럼 엉성한 느낌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유치하고 전문가의 느낌'이 아니란 이유로 가장 먼저 빠질 가능성이 높다. 혹시 모를 혜안(혹은 실수) 덕분에 최종 그룹에 포함된다 해도 이제 전문가 평가가 기다리고 있다. 국가를 상징하는 화폐 디자인을 논하는 중요한 자리이므로 일단 그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분들이 필요하다. 전직 문화부 장관, 사학과 교수, 유명한 노화백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이들은 평생 쌓아온 업적이 굉장한 분들이다. 디자인에 대한 전문성만 빼고. 아, 물론 디자인 전문가도 참여하니 걱정하지 마시길. 다만 대기업 센터장을 지낸 고위 임원 출신의 디자이너와 유명 학교의 디자인학과 교수 등 앞서 말한 사람들과 소위 '급'이 맞느냐가 아마 선정 1순위로 꼽힐 것이다. 중요한 국가 대사에는 그들이 쌓은 인생의 지명도가 필요하고 디자인은 '그리고, 만든다'는 점에서 만류귀종 아니던가. 자동차를 만들든, 만화를 그리든, 심벌을 디자인하든 말이다.

심사장에서 일어나는 갑론을박의 중심에는 디자인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전통성, 특정 대상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 등 신선한 디자인적 시도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가 더 크게 들릴 지도. 대국민 공모전이라 필연적으로 생기는 작품의 '비전문성'은 심사위원의 매서운 눈을 벗어날 수 없다. "얘들 장난도 아니고"란 목소리가 계속 울리는 심사장에서 피어스의 식물 디자인은 어둠 아래 하염없이 깔렸을 것이다. 여러 번 진통을 겪고 탄생한 수상작은 어쩌면 공개가 안 될지도 모른다. 공모작의 '비전문성' 때문에 실제로 쓰일 화폐는 '전문적인 곳'에서 진행해야 한다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제 진짜 화폐를 디자인하는 업체 선정과 디자인 심사는 소리소문 없이 진행되고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동전 디자인"이란 제목과 함께 신문 1면에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이런 시나리오가 분명 억측일 수도 있다. 대국민 공모전의 수상작이 그대로 화폐가 될 수 있고, 그 디자인이 피어스의 새로운 1파운드 디자인보다 더 전위적이고 신선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피어스와 관련된 기사에 무수히 달린 댓글에서 눈에 띄는 반응 대부분은 '부럽다', '멋지다', '역시' 등 그 선택의 유연함에 대한 감탄이었다. 우리나라의 실정을 비꼬는 자조 류도 상대적으로 절대 밀리지 않았다. 좋은 것을 접할 때 감탄이 나오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새로운 1파운드 디자인의 경우도 과연 당연하다고 치부해야 할까. 좋은 것만 보고 살기에도 모자란 게 삶이다. 그래서인지 앵무새처럼 비슷한 감탄만 내뱉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고 아쉽다. 여러모로 감탄하기 지겨운 세상이다.

thedesigncrack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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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CA Korea 2015년 04월호 'Insight'에 기고한 칼럼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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