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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불편부당 객관주의가 키운 '홍역 확산'

미국에서는 근래 최악의 홍역 집단 발병 사태가 일어난 것을 두고 언론의 책임론이 일고 있다. 예방접종이 자폐증을 야기한다는 연예인 등의 이야기를 언론이 적극적인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보도함으로써 어린이들의 예방접종률을 낮췄고, 이것이 결국 집단 발병으로 이어졌다는 이유에서다. 의학 등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서 판단을 내리는 대신, 양쪽의 견해를 소개하는 미국 언론의 '기계적 객관주의'도 매카시 논란을 확산시킨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 서수민
  • 입력 2015.03.13 07:13
  • 수정 2015.05.13 14:12
ⓒGetty Images

미국에서는 근래 최악의 홍역 집단 발병 사태가 일어난 것을 두고 언론의 책임론이 일고 있다. 예방접종이 자폐증을 야기한다는 연예인 등의 이야기를 언론이 적극적인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보도함으로써 어린이들의 예방접종률을 낮췄고, 이것이 결국 집단 발병으로 이어졌다는 이유에서다.

언론이 예방접종 음모론 확산

올해 들어 미국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17개 주에서 154명이나 홍역 발병 사례가 보고됐다. 어린이들이 많이 가는 디즈니랜드 등에서 발병자가 집중 발생했다. 홍역은 감염성이 매우 높아 감염자와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면역력이 없는 이들의 80~90%가 옮을 수 있다. 어린이들에게 사망이나 장애의 위험까지 안길 수 있는 만만치 않은 병이다.

미국은 이미 2000년 홍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선포한 바 있다. 1963년 홍역 예방접종이 개발되기 이전에는 해마다 수백만 명이 홍역에 걸리고 이 가운데 수천 명이 사망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홍역은 미국에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병이 됐다.

최근 다시 홍역이 발병한 것은 홍역 예방접종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괴담'이 확산돼 어린이 예방접종률이 눈에 띄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논란의 기원은 1998년 영국의 앤드류 웨이크필드 박사가 저명 의학잡지 랜싯에 돌 무렵 접종하는 홍역·볼거리·풍진(MMR) 복합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기고하며 시작됐다. 이후 논문은 허위로 드러났고, 웨이크필드 박사는 의사 면허를 박탈당했다. 이후 그 어떤 과학적 연구도 예방접종과 자폐증의 관계를 확실히 입증하지 못했다.

그러나 논문이 공식으로 철회되기까지는 무려 12년이 걸렸으며, 이미 자폐아 부모들 사이에서는 '예방접종=자폐증'이라는 공식이 마음속 깊이 각인된 상태였다. 급증하는 자폐증의 원인에 대해 기존 의학 연구가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막강한 힘을 가진 다국적 제약회사가 이윤 극대화를 위해 각국 정부에 로비를 해 예방접종을 의무화하고 있고, 이에 아이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예방접종 회의론자들의 주장이 그럴싸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음모론'의 확산에 미국의 주류 언론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텔레비전의 사랑을 받은 금발머리 연예인, 제니 매카시가 있다.

1972년생인 매카시는 플레이보이 누드모델로 연예계에 진출한 뒤 연기와 토크쇼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그는 2007년 아들 에반이 2년 전 MMR 예방접종을 맞은 뒤 자폐증 진단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활발한 방송과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아들처럼 예방접종이 건강한 어린이를 자폐증 환자로 만드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자폐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각종 민간요법 등을 적극 활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판된 제니 매카시의 책 '예방접종이 자폐를 부른다'.

전문적 판단 대신 '기계적 객관주의'

의학 전문가와 거리가 먼 매카시를 자폐증 전문가로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CNN과 '오프라 윈프리 쇼' 등 미국의 주요 방송들이었다. 매카시는 CNN에서 "예방접종으로 자폐증에 걸리느니, 차라리 다른 전염병에 걸리는 게 낫다"며 "우리의 예방접종 거부권을 존중해 달라"고 말했다.

미국의 저명 방송국 ABC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2013년 낮 토크쇼 '더 뷰'에 매카시를 패널 멤버 중 한 명으로 1년간 출연시켰다. 뉴스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정통 언론인으로 신뢰도가 높은 앵커 출신인 바바라 월터스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매카시를 출연시키며 매카시의 권위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매카시의 잇따른 텔레비전 출연 배경에는 그의 매력적인 외모뿐만 아니라 말도 꽤 조리 있게 하는 등 텔레비전 시청률을 높일 만한 여러 조건을 두루 갖췄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의학 등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서 판단을 내리는 대신, 양쪽의 견해를 소개하는 미국 언론의 '기계적 객관주의'도 매카시 논란을 확산시킨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브랜던 나이헌 다트머스대 교수는 컬럼비아저널리즘리뷰 기고문에서 "저명 언론사조차 허무맹랑한 매카시의 믿음을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는 식으로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꼬집은 바 있다.

예방 접종을 둘러싼 미국 언론의 관망적인 보도 양태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과학자들이 예방접종 관련 '논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듭 밝히는 상황에서도 "백신 논란, 정치 논란으로 불거져"라는 식의 보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미디어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 '온더미디어'가 최근 보도했다. 물론 언론만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계에서도 의사출신인 랜드 폴 켄터키 상원의원과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가 예방접종 거부권을 지지하는 듯한 견해를 밝혔다가 엄청난 비판을 받자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한 바 있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잘못된 언론보도

이와 같은 '논란 아닌 논란'은 급증하는 자폐증에 대한 불안감, 기존 의료 시스템에 대한 불신 등 미국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당장의 공중 보건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에 이번 홍역 사태의 진앙지인 캘리포니아에서는 필수 예방접종률을 높이기 위해 의사의 허락 없이는 예방접종을 거부하기 어렵게 하는 새로운 법안이 상정돼 있다. 개인의 신념이나 종교적인 이유로 예방접종을 거부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 언론도 의학 등 관련 보도 때 무조건적인 '불편부당'을 추구하기보다는 더욱 냉철하게 사실에 입각한 보도를 해야 한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미접종 영유아들의 발병이 잇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잘못된 언론 보도는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것이 이번 사태의 교훈이다.

참고문헌

Brendan Nyhan. (July 16, 2013). Why 'he said,' 'she said' is dangerous. Columbia Journalism Review.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Measles cases and outbreaks.

On the anti-vax non-troversy. (Feb. 6, 2015). OntheMedia.

*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신문과 방송> 3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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