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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5월 28일 14시 31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5월 28일 14시 31분 KST

산초 그 이상 –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후기

산초는 자신의 신념을 쏟아 ‘산초 그 이상’이 되고, 산초는 그렇게 돈키호테가 된다.

huffpost

1.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The Man Who Killed Don Quixote)는 테리 길리엄(Terry Gilliam) 감독이 세르반테스(Cervantes)의 유명한 소설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자신의 세계 내에서 재창조해 낸 것이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모습을 그리고 그의 충실한 하인 산초 판자(Sancho Panza)와 나란히 승마하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하지만 그 모습들 이외에 딱히 더 이상 돈키호테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많은 이미지들을 당신의 뇌리에 남겨 줄 것이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그 이미지는 유지될 것이고, 언젠가 당신이 만들어 낼 어느 콘텐츠 속에서 그 이미지는 재창조되어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만든 그 콘텐츠를 통하여, 한 단계 더 발전할 것이다.

모든 소설가는 각자의 지식체계와 기호체계를 사용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 내는 다니엘 슈레버(Daniel P. Schreber)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내 나름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소설을 쓴 저자든 이를 읽는 독자든, 인간으로서의 심리를 보유하고 있는 한 지그문트 프로이트(S. Freud)의 사정거리를 벗어날 수 없다. 프로이트는 심리학과 문학 사이의 연결점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프로이트 전문가이자 문학이론가 마르트 로베르(Marthe Robert)는 그렇게 주장했다.

그의 저서 <소설의 기원, 기원의 소설>(Roman des origins et origins du roman, 1972)에서, “모든 소설가들은 필연적으로 두 세계 중 하나로 이끌린다. 소설가가 오이디푸스적 사생아의 성향을 강하게 갖고 있으면 세상을 향해 뛰어들게 되고, 업둥이의 성향이 강하다면 의도적으로 ‘다른’ 세계를 창조하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진실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고 썼다. 그는 전자의 예로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디킨스를, 후자의 예로, ‘세르반테스’와 카프카(F. Kafka)를 들고 있다. “업둥이의 방법인 낭만주의적인 방법은 지식도 행동능력도 없어서 세계와의 싸움을 교묘하게 피하는 것이고, 사생아의 사실주의적인 방법은 세계를 정면으로 공격하면서도 세계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하비에르’와 ‘토비’에 대한 길리엄의 묘사는 로베르의 연구 결과와 비슷하다. 마치 로베르의 저서를 읽고 길리엄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장치와 묘사를 씬(scene)마다 삽입한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실은, 소설 돈키호테의 주요 주제들임에는 틀림없다.

2.

“결혼한 남자의 행동을 오염시키는 두 가지 중대한 죄가 면제되어 있다. 그가, 성적인 탐욕과 그것의 경제적 대응물인 유산자의 격렬한 욕망이 도처에서 야기하는 악을 씻어내는데 특별히 적합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결국 돈키호테는, 경제적이고 성적인 영역에서 제외되어 번민하는 인류의 죄를 전적인 자기 희생으로 대속하는 무류(無謬)의 심판자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의 야심의 본질을 호도하는 서사적 중요성을 단번에 획득한다.”

“그는 육체적인 사랑을 거부하는 한 매춘부로 하여금 자신에게 기사 칭호를 부여하게 한다. 그는 육체를 부정하는데 자신에게 가해지는 구타들로 인해 끊임없이 자기 육체를 고려하게 된다.”

“그는 재워주고 먹여주는 사람들에게 결코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그는 산초를 자신의 욕망의 노예로 취급하며, 자신을 위해 실컷 고통받도록 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공평함에 대하여 스스로 크게 떠들어댄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대체로 모든 것이 자신에게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원칙적으로, 그리고 원칙에 의해, 착하고 고결하고 관대한 그는, 공격적이고, 타인들의 고통에 무감각하며, 행동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부터 참을 수 없게 전제적이다. 그의 목표의 비현실성으로 인해서 무력하고 순결한 그는, 타인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간섭할 때마다 해를 끼치는 재주가 있다.”

광고촬영장에서의 행동 묘사를 통해 왜 굳이 광고 감독으로서의 ‘토비’의 성정을 안하무인의 캐릭터로 설정했는지, 아빠는 자신의 딸인 ‘안젤리카’를 두고 왜 굳이 창녀(whore)라고 표현했는지, 왜 굳이 ‘하비에르’는 돈키호테의 몸인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하는지, 보스의 부인 ‘재키’과의 불륜이 왜 굳이 등장하는지, 금화를 왜 굳이 ‘토비’는 자신의 눈에 얹어 ‘돈에 눈 먼’이라는 은유를 만들어 내려 했는지, 로베르의 말을 듣자면 조금씩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3.

이 영화의 설정이 흥미로운 이유는, 소설, 영화, 광고라는 세 장르 –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는 - 의 미묘한 긴장관계를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읽는 이가 없는 소설, 관람객이 없는 영화, 보는 이가 없는 광고는 존재의의가 없다. 모두 ‘대중’(Mass)이 있어야만 비로소 유의미해진다. 이 영화는 원전 소설에서 등장하는 주요 상징들 – 풍차, 경제적 부, 매춘부 등 – 을 현 시대의 날줄로 하여, 소설, 영화, 광고라는 미디어의 속성에 대한 길리엄 자신의 사상을 날줄로 촘촘히 엮었다.

이 영화를 볼 때의 관전 포인트 또는 관람 이후 반추 포인트는, 나라면 어떤 장치를 넣고 어떤 장치를 뺐을 것인지 상상해 보는 일이다. 나의 어릴 적 꿈은 광고 감독이었다. 몇 십 초 안에 강렬한 메시지를 많은 이들에게 흠뻑 전달한다는 일이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광고는 메시지를 뇌리에 몇 십 초 안에 삽입해 넣고, 영화는 메시지에 공감할 세계관을 마음 속에 몇 시간 안에 보여주어 배치한다.

아직도 난 그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운명이 나를 법학으로 이끈 탓에 법조에 몸 담고 있지만, 어떤 내용의 메시지를 창조해 낼지가 앞으로의 내 평생 공부의 화두이기도 하다. 공부량이 늘면서 메시지는 점점 복잡해졌다 간결해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과거의 영화 돈키호테의 감독은 현재 천재 광고감독 ‘토비’가 되었다. 소설 돈키호테를 영화 돈키호테로 만든 그는 시간이 흘러 유명한 광고감독이 되어, 자신의 광고에 돈키호테를 소재로 쓴다. 우연일까, 그 광고의 촬영지가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해 준 10년 전 그 영화 촬영지 근처인 것은 돈키호테의 에너지가 그를 다시 그곳으로 소환한 것일까. 욕구불충족의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순수하고 열정넘쳤던 자신에게로 회귀본능이 발동한 것일까.

4.

호세 이 오르테가(José Ortega y Gasset)는 1914년 <돈키호테에 관한 성찰>을 간행했다. 세르반테스의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통해 사랑하는 그의 조국 에스파니아를 다시 바라보았다. 오르테가는 유럽의 상대적 변방인 에스파니아 - 내 생각엔, 에스파니아와 한국은 닮은 구석이 많다! - 가 과거의 영광을 어떻게 재현할지를 고민한 사상가이자 철학자다. 그는 ‘돈키호테(Don Quijote)’에 관하여 책을 썼고, ‘돈 후앙(Don Juan)’에 관하여도 책을 썼다.

내가 오르테가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의 명저 <대중의 반란>(La rebelión de las masas, The Revolt of the Masses, 1930)을 읽으면서부터다. 이 책이 던지는 주요 화두는 21세기인 지금도 유효하다. 민주주의의 발달, 소셜미디어의 발달 덕분에 그의 정확한 예지력이 더욱 빛난다. 그에 의하면, 사회는 ‘소수자’와 ‘평균인(대중)’으로 구성된다. 근대의 소수자는 귀족이었다. 현대의 대중은 근대의 소수자인 귀족의 아래와 같은 특징적 성질들을 닮아 모방한다.

“예를 들어 삶의 중심적인 관심을 도박과 스포츠에 두는 경향, 자신의 육체에 대한 강한 관심 – 위생과 의복의 미에 대한 관심, 여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로맨티시즘의 결여, 지식인과의 교류를 즐기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들을 존경하지 않고 하인이나 간수에게 채찍을 치라고 명하는 것, 자유토론의 제도보다도 절대적 지배자의 밑에서 사는 것을 원하는 일 등등.”

오늘날 거의 모든 대중은 문명의 혜택을 받은 상태에서 이러한 특질을 가진다. ICT 기술의 발달은 현대의 평균인들을 근대의 소수자인 귀족에 더 가깝게 만든다. 현대의 평균인들은 서로에 대해 관심이 많은 쪽과 서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쪽을 극명하게 양극화되고 있다. 나는 리스먼(David Riesman)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1950)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5.

오히려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의 <군중과 권력>(Masse und Macht, 1960)에서의 군중(Masse)에 비교해 보는 편이 적절하다. 그 속성을 고민한 점은 닮았지만, 카네티가 분석한 ‘군중’과 오르테가가 분석한 ‘대중’은, 그들이 응시하는 ‘Mass’는 그 연구와 성찰의 결이 다르다. 21세기 ‘매스’미디어(Mass-media) 시대에서 두 저서를 읽고 교차하여 고민해 보는 일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더 넓혀준다. 그리고, 백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인간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도 깨닫게 된다. 라만차의 돈키호테에 수백년 동안의 독자들이 공감하고 웃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삶은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한 싸움이자 노력이다. 내가 자신의 삶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은 실로 나의 활력과 능력을 일깨워 주고 활용하게 해 준다.”

삶에 대한 철학자 오르테가의 이러한 접근법은 이미 그가 십수년전에 저술한 ‘돈키호테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싹텄는지도 모른다. 오르테가는 “돈키호테는 근대 고뇌에 들볶인 크리스트(Christ)이며, 자신의 순진과 자기의 의지를 잃어버려서 다른 새로운 순진과 의지를 찾아 헤매는 비통한 이미지가 창조한 우리들 마을의 해학적인 크리스트다”라 했다.

소설이 주류 일 때는 소설이 돈키호테이고, 영화가 산초가 된다. 영화가 주류일 때는 영화가 돈키호테가 되고, 광고는 산초가 된다. 대중(Mass)의 지원과 응원에 힘입어, 산초는 자신의 신념을 쏟아 ‘산초 그 이상’(More than Sancho)이 되고, 산초는 그렇게 돈키호테가 된다. 착각이든 환상이든 망상이든 무모함이든,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가치가 있다. 그 가치를 잃지 않는 한, 언젠가는 돈키호테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아, 산초 판자(Sancho Panza)?

*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