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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문 대통령의 교육공약

ⓒDONGSEON_KIM via Getty Images
ⓒhuffpost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만들곤 했던 역대 정치 지도자들의 타성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예외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대통령 취임 1년3개월여가 지난 오늘, 후보 시절 약속했던 교육부문 공약은 거의 실종됐다. 과문의 탓일까, ‘2020년 최저임금 1만원’ 공약 불이행 건과 달리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사과나 유감의 뜻조차 듣지 못했다.

급기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좋은교사운동, 참교육학부모회 등 교육단체들이 나서 8월29일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지킴이 국민운동’을 발족했다. 국가행정을 총괄 지휘하고 집행하는 최고책임자이며 국가수반인 대통령의 약속을, 정부도 집권당도 아닌 힘없는 학부모들과 교사들이 지키겠다고 나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교육단체들이 대신 지키겠다고 적시한,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내놓은 교육부문 공약을 되짚어보자. 혁신학교의 전국적 확대, 자유학기제 확대, 초중고 문예체 교육 강화, 특목고의 일반고 전환, 2015 개정교육과정에 따른 수능 절대평가 실시를 비롯하여 학생 맞춤형 학습을 위한 초중고 필수과목 최소화 및 선택과목 확대, 수시 수능최저학력기준 폐지 검토, 영유아 대상 과도한 사교육 억제, 아동인권법 제정으로 적정한 학습시간과 휴식시간 보장 등이다. 경쟁의 늪에서 삶 자체가 피폐해지는 우리 학생들의 일상에 비춰 최소한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당신네 나라는 혁명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아이들을 그토록 학대할 수 있나요?” 거의 30년 전 일인데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말이다. 그녀는 분노에 차서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는 양 몰아세웠다. 자녀를 셋 두었고 프랑스에서 작은 기업을 경영하던 그녀는 서울에 출장여행을 왔다가 거리에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아이들의 야간수업, 보충수업, 학원, 과외로 채워진 일상에 관해 듣게 되었다. 우리에겐 충분히 익숙해진 일상이지만 그녀에겐 혁명이 필요한 수준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그렇게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있으면서 사람들이 무심하다면 사회구성원 중 누가 고통을 겪어도 무심하지 않겠느냐고 힐문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한국의 교육현실은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만큼 아이들의 일상은 더욱 힘들어졌다. 2030세대가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가 되어 지난날 ‘필수’에 속했던 결혼/출산/양육이 ‘선택’도 아닌 ‘포기’가 된, 출산율 세계 최하의 ‘헬조선’에서 교육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실은 본디 ‘바꾸어야 할 현실’과 ‘받아들여야 할 현실’의 중간 어느 지점에 있어야 하는데, 모든 현실이 ‘받아들여야 할 현실’을 뜻할 만큼 변화 요구에 억압적인 사회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 때문이었든, 본디 불온한 탓이었든, 나에게 그려진 교육혁명의 유일한 가능성은 “도저히 못 참겠다!”면서 아이들이 학교 문을 박차고 거리로 온통 쏟아져 나오는 광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야만 어른들이 제정신을 차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진 것인데, 그것이 나의 꿈으로 계속 머물러 있던 중, 결코 일어나선 안 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250명의 아이들을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고, 경기도교육감 시절부터 혁신학교의 초석을 다진 김상곤씨가 교육부 장관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 또한 나름 기대감을 가졌고, 이 난에 ‘민주공화국의 학교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오늘 ‘실종된 문 대통령의 교육공약’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는 중에 교육부 장관이 경질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위에 소개한 ‘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지킴이 국민운동’ 발족에 참여한 단체들은 그에 하루 앞선 기자회견에서 “‘2022학년도 대입개편 공론화’와 ‘학생부 신뢰도 제고 방안’ 정책숙려제가 문 대통령의 공약을 지키지 않는 책임회피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하고, “정책결정의 책임을 시민에게 전가하는 정책숙려제를 거부한다”고 밝혔다. 또 “지금까지의 공론화가 교육적 가치와 비전에 대한 치열한 토론과 시민의 판단으로 이어지기보다, 상반된 의견을 봉합하는 수준의 결론을 내도록 하는 데 그쳤다”고 비판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교육문제를 풀려면 장기적 안목과 철학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정책 입안과 집행에서 일관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문제는 단기적 대응과 처방에 치우친 정치로는(미디어 환경은 점점 더 이런 경향을 강화할 것이다) 애당초 교육문제에 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장기적 해결 과제인 교육부문과 단기성에 머문 정치 사이에 엄청난 비대칭성이 있는데, 이 비대칭성은 가령 ‘선출되지 않은 행정’(교육부 관료)이 ‘선출되는 정치’(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선택한 교육부 장관)를 장악할 수 있게 한다.

개혁 방향의 일관성을 담보할 철학이 없고 정치적 힘이 작용하지 않는 ‘공론화’와 ‘정책숙려제’는 ‘공론’과 ‘숙려’라는 이름을 빌렸지만 ‘행정’ 차원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공론화’가 수능 정시 확대와 상대평가, 특목고·자사고의 경쟁률 제고와 혁신학교 방향 차단 등 문 대통령의 교육공약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결과를 낳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점은 정책숙려제 2호 안건으로 부칠 예정인 ‘유치원 방과후 영어학습 금지 개선안’에 관해 김영식 좋은교사운동 대표가 “사교육을 잡지 못하는 현실에서 값싼 공교육인 유치원 방과후 영어교육을 허용하되, 교육부가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정도로 끝날 것”이라고 말한 데서도 확인된다.

요컨대 건실한 교육 철학과 이를 밀고 나갈 정치적 힘이 관건이다. 교육 관련 토론에서 핀란드의 예가 자주 나오는데, 그들은 집권세력이 바뀌었어도 교육개혁의 일관성을 지켰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 정치세력이 합리적 보수와 건전한 진보 사이의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면, 우리는 분단체제 아래 수구적 보수가 막강한 정치세력이 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극복해야 하는 관계로 자리매김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적폐세력의 존재가 교육개혁에서도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것인데, 오늘 그들이 약해졌음에도 그 관성과 자성은 곳곳에 강하게 남아 있다.

양승태 대법원의 온갖 사법농단이 밝혀진 오늘까지도 전교조 불법화 행정명령을 취소하라는 목소리는 외면한 채, 아직도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인가, 집권여당 대표는 대표가 되자마자 “4·19에 의해 무너진” 이승만과 “4·19를 무너뜨린” 박정희를 참배했다. 교육부 장관과 총리를 지낸 집권당 대표가 “4·19 이념을 계승한다”고 적힌 헌법의 정신을 배반하는 행동을 마다하지 않는데 교육 철학은 무슨 헛소리고 이런 땅에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것인가. 그럼에도 뜻있는 소수 사람에겐 학부모와 교사의 절절한 목소리가 들려야 하지 않겠는가.

“누군가는 반문할 것입니다. ‘힘 있는 정치권력이 그렇게 결정했는데, 힘없는 당신들이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이들의 부모들이요 선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어른들의 잘못으로 이 고통이 지속되었으니 우리의 힘으로 이 고리를 끊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나서는 것은 정치인들이 그토록 자주 말하던 국가 발전을 위함이요, 죽어가는 우리 아이들의 생명을 지켜주고자 함입니다. 정치권력이 잘못된 결정으로 저 힘없는 아이들을 버렸다 해도, 우리는 이 아이들을 결코 버릴 수 없고 이 아이들 곁을 지켜야 합니다.”(‘문재인 대통령 교육공약 지킴이 국민운동’ 발족문에서)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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