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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프포스트 인터뷰] 제주 예멘 난민들을 만나다 : 내 이름은 이스마일

그에게 한국은 "문명화된 나라"다.

549명에게는 549개의 이야기가 있다. 549개의 서로 다른 삶이, 생명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좀처럼 개별적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뭉뚱그려 ‘제주 예멘 난민’으로 지칭된다. ‘우리’를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로 간주돼 배제와 차별에 시달린다. 이들은 누구일까. 왜 집을 떠나와야 했던 걸까. 질문들은 좀처럼 벽을 넘지 못한다.

허프포스트는 사흘 동안 제주에서 예멘인 다섯 명과 마주 앉아 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 예멘 난민’으로 묶는 대신, 각자의 이름과 삶을 끄집어냈다. 이들의 경험은 비슷하지만 또 각각 달랐다. 오고 가며 인사를 주고 받은 다른 예멘인들의 삶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모든 삶은 개별적으로 말해져야 한다. 

이스마일(30)이 예멘에 있는 어머니와 통화하고 있다. 예멘에는 그의 모친과 남동생이 있다. 먼저 사우디로 떠났던 형은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이스마일(30)이 예멘에 있는 어머니와 통화하고 있다. 예멘에는 그의 모친과 남동생이 있다. 먼저 사우디로 떠났던 형은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HuffPost Korea/Yoonsub Lee

이스마일의 이야기 

″전쟁 전까지 내 삶은 평범했다. 꿈도 많았고, 기자로 일하면서 사람들에 대해, 또 내 의견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기자로서 이름을 알리기 좋은 시절이었다. 일이 없을 때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내 꿈을 쫓았다. 그 꿈들은 현실이 되려던 참이었다.” 이스마일은 기자였다. 소설과 시를 즐겨쓰는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다른 예멘인들의 삶도 마찬가지로 평범했다. ”모두가 평화롭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위험 같은 건 없었고, 사람들은 나누면서 살았다. 서로 지지하는 쪽이 다르다 하더라도 함께 지냈다. 옛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새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의견을 가졌다 하더라도 서로 존중했다.”

평범했던 그의 삶은 흔들렸다. 그는 후티 반군의 잔혹한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위협을 받았다. 그가 살았던 사나는 후티 반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휴대폰, 페이스북 계정은 물론, 모든 흔적을 지웠다. 가족과도 연락을 끊은 채 1년 반 동안 한 시골 마을에 몸을 숨겼다. 그럼에도 그는 예멘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후티 반군 점령 이후) 많은 사람들이 예멘을 떠났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도 예멘을 떠날 것을 권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위협이 나에게 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신문사 문을 닫아버리기 전이었는데, 자신들에 반대하는 글을 페이스북이나 신문에 계속 쓰면 나를 납치하거나 살해하겠다고 위협해왔다.”

후티 반군은 그가 몸을 숨기고 있던 지역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는 예멘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모친과 남동생을 남겨두고 혼자 길을 떠났다. 요르단, 두바이를 거쳐 말레이시아로 갔다. 예멘을 떠날 때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꼈다. ”삶의 모든 걸 잃어버리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이스마일은 그곳에서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6~7000달러를 주면 한국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며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합법적인 방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제주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는 ”복권에 당첨된 것 같았다”.

이스마일은 예멘에 있는 어머니와 서로 음식 사진을 주고 받으며 그리움을 달랜다.
이스마일은 예멘에 있는 어머니와 서로 음식 사진을 주고 받으며 그리움을 달랜다. ⓒHuffPost Korea/Yoonsub Lee

한국은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 ‘강남스타일’도 있었고 ”유명한 한국 가수” 이민호나 한국영화도 친숙했다. 이스마일은 2009년 예멘과 한국이 맺은 ”큰 가스 계약”도 기억한다. 연간 200만톤의 LNG가스를 20년 간 한국에 수출하는 내용의 이 계약은 당시 ”예멘 최대 가스 프로젝트”로 불렸다.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상태다.

이스마일은 제주에 도착하던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모를 거다. 나는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 말레이시아에서보다 더. 말레이시아에서는... 한국인들은 웃음으로 대해줬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더 행복하고, 더 안전하고. 모든 게 더 좋았다.”   

그에게 한국은 ”훌륭한 나라, 문명화된 나라”다. ”여기에는 인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왔다.” 출입국외국인청 직원들의 친절에도 놀랐다고 했다. ”뜻밖의 일이었다. 이 사람들이 하늘에서 왔나 싶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이건 큰 차이로 다가왔다. 

″이 전쟁은 종교와 무관하다.” 이스마일은 단언한다. 그는 후티 반군 뿐만 아니라 정부를 지원하고 있는 사우디에도 비판적이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왔지만 우리는 이걸 전쟁범죄라고 부른다.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고 해서 이걸 감출 수는 없다. 나는 어느 쪽의 편도 아니다. 나는 사람들의 편이다.”

지금은 ‘무교’이지만 그도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이슬람은 ”평화로 돌아가자는 종교”다. ”남을 돕고,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극단주의자들은 무슬림이 아니다. 전 세계 곳곳에 수억명의 무슬림이 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건 그의 잘못이다. 한 사람, 한 집단의 잘못으로 나머지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  

평범한 일상. 지금 가장 큰 꿈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뭔가 좋은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동료 예멘인들의 통역을 돕고 지원단체들의 일손을 거들고 있다.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한국을 떠나게 되더라도 좋은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한국은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 나를 받아주지 않았어!’ 이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화가 난 상태로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내 신청이 거절되더라도 나는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좋은 감정으로 한국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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