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막고 평화를 일군 이들에게 주어지는 노벨평화상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수상 집착에 노르웨이가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수상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평화상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복을 당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10월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캐비닛룸에서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오찬을 하던 중, 밀레이 대통령이 자신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한다는 내용의 서한이 담긴 액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8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노르웨이에서는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누구든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려 보복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2029년까지 노벨평화상 시상을 잠정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보복 성향을 보이는 미국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는 것이 평화를 증진하기는커녕 오히려 해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부터 노벨평화상에 강한 집착을 보여왔다. 자신이 여러 전쟁을 끝냈다며 수상 자격을 거듭 주장했고 노르웨이 고위 당국자에게 직접 연락해 수상을 압박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옌스 스톨텐베르그 노르웨이 재무장관의 휴대전화로 직접 전화를 걸어 노벨평화상 수상을 요구했다. 스톨텐베르그 장관은 과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 시절 트럼프 대통령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인물이다.
수상에 대한 집착은 외교 문제로까지 번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요나스 가르 스퇴레 노르웨이 총리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내가 8개 이상의 전쟁을 끝냈는데도 당신 나라가 내게 노벨평화상을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며 "이제 더 이상 오로지 평화만을 생각해야 할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고 밝혔다.
당시는 트럼프 대통령이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미국이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럽 국가들과 갈등을 빚던 시기였다. 그로부터 몇 주 뒤 미국은 이란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수상자 발표를 앞두고도 자신의 공적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7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노벨평화상에 관한 질문을 받고 "아마 어떤 대통령도 전쟁을 해결한 적이 없을 것"이라며 "하지만 나는 8개의 전쟁을 끝냈다. 그것도 아주 큰 전쟁들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지난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를 언급하며 "마리아가 내게 노벨상 메달을 건네면서 올해 내가 상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노벨상 역사상 나보다 수상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마차도는 지난 1월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의 노벨평화상 메달을 전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전 대통령을 축출한 지 몇 주 만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국제축구연맹(FIFA)이 새로 만든 평화상의 첫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는 '8개 전쟁 종식'은 논란의 여지가 크다. 그가 해결했다고 내세우는 가자지구와 콩고민주공화국의 무력 충돌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일부 분쟁은 다른 주체들의 중재로 마무리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기에 이란 전쟁까지 계속되면서 노벨평화상 수상 명분은 더욱 약해졌다는 평가다.
노르웨이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수상 가능성은 사실상 논의 대상에서 멀어진 분위기다.
노벨평화상 선정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헨리크 쉬세 오슬로 평화연구소(PRIO) 연구교수는 워싱턴포스트에 "트럼프가 거의 논의에서 사라진 것 같다"며 "노벨평화상은 언제나 정치적·지정학적 파장을 낳았지만 트럼프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다"고 지적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정부와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다만 위원들은 노르웨이 의회가 임명하며 의회의 정치적 구성이 반영된다. 투표권을 가진 위원 5명 가운데 3명은 과거 공개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가능성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9월12일 보도된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Fortune)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합의하기 어렵지 않은 사안에 합의한다면 두 사람이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트먼은 미국과 중국이 인공지능(AI) 개발에 따른 위험을 줄이기 위한 합의에 나서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같이 언급했다.
한편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한국시간으로 10월 9일 오후 6시 발표된다. 시상식은 오는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로는 개인 208명과 단체 79곳 등 총 287건이 추천됐다. 노벨재단 정관에 따라 후보 명단과 추천자, 추천서 등 관련 자료는 50년간 비공개가 원칙이다.
올해 후보로 추천된 대상 중에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2024년 12·3 비상계엄 사태를 극복한 대한민국 시민들도 포함돼 있다.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지난 2월 세계정치학회(IPSA) 전·현직 회장 등 정치학자들이 대한민국 '시민 전체(Citizen Collective)'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