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볼턴의 유산 : 무너진 NSC 체계, '족쇄 풀린' 트럼프

볼턴이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있던 17개월 동안, 미국의 외교정책 결정 프로세스는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2019-09-11     허완
U.S. National Security Adviser John Bolton speaks during a press conference in Jerusalem, Tuesday, June 25, 2019. .(AP Photo/Oded Balilty) ⓒASSOCIATED PRESS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역할은 대통령의 아젠다를 추진하고 관계부처 간 절차를 효과적으로 조정하는 것이지, 자기들의 아젠다를 추진하는 게 아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때 한국에서 유행했던 표현을 빌자면 볼턴이 ‘자기 정치’를 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지금 그 조정 절차가 깨져있다”는 증언이었다.

WSJ는 당시 취임 8개월째였던 볼턴에게 ‘볼턴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고 전했다. 볼턴은 ”나는 국가안보보좌관이지 국가안보 (정책)결정자가 아니다”라며 극구 손사래를 쳤다. 그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에고로 똘똘 뭉친 도널드 트럼프는 ‘나대는’ 측근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볼턴이 1년5개월 동안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하면서 트럼프를 지렛대 삼아 틈틈이 자신의 아젠다를 추진해왔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굵직한 성공 사례도 있었고, 주변의 견제와 장벽(즉, ‘트럼프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음’)에 가로막힌 적도 적지 않았다.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결국 그의 뜻대로 된 일들도 많았다.

어쨌거나 볼턴이 그렇게 자신의 오랜 매파적 구상을 실현하는 데 열중하는 동안 국가안보회의(NSC)의 역할과 기능은 크게 축소됐다. 이제 누가 후임으로 오더라도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을 결정하는 이 전통적인 체계가 복구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적어도 트럼프의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건 볼턴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나 호불호와는 별개로 꽤나 음울한 신호일지도 모른다.

WASHINGTON, DC - JULY 18 : National Security Advisor John R. Bolton listens as President Donald J. Trump meets with Prime Minister of the Netherlands Mark Rutte in the Oval Office at the White House on Thursday, July 18th, 2019 in Washington, DC. (Photo by Jabin Botsford/The Washington Post via Getty Images) ⓒThe Washington Post via Getty Images

 

‘보좌’에 만족하지 않았던 보좌관

이란과 북한을 ‘선제타격’해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비효율적이고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유엔이나 국제형사재판소 같은 국제기구들을 공격했다. 

이란 핵협정 탈퇴를 선언했다. 

폴리티코의 올해 초 기사를 보면, 그의 사무실 한 쪽 벽에는 자신이 작성한 이란 핵협정 탈퇴 행정명령으로 만든 액자가 걸려있었다. 핵협정 탈퇴에 관한 볼턴의 역할을 묘사한 월스트리트저널의 일러스트레이션 밑에 트럼프가 자필로 ‘존, 훌륭했네’라고 적어넣은, 이방카 트럼프로부터 받았다는 선물도 액자로 걸어뒀다. 

파기 선언, 유엔 인권이사회 탈퇴,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 지원금 집행 중단,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대한 제재 위협 등이다. 모두 트럼프가 그 전에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을 만큼 거의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볼턴 자신이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던 것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WASHINGTON, DC - MAY 1 : National Security Advisor John R. Bolton speaks to reporters and members of the media outside the West Wing at the White House on Wednesday, May 01, 2019 in Washington, DC. (Photo by Jabin Botsford/The Washington Post via Getty Images) ⓒThe Washington Post via Getty Images

 

NSC를 무너뜨린 NSC 수장

일하는 방식도 달랐다. 여러 차례의 보도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볼턴은 관계부처 장관들이 모여 외교안보 정책을 논의하고 조율하는 공식 회의를 거의 소집하지 않았다. NSC의 핵심적인 기능이 정지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대신 그는 국무장관 및 국방장관과 조찬이나 오찬을 하면서 소규모 비공식 회의를 갖거나 대통령과 일대일로 만나는 걸 선호했다. NSC 직원들과의 회의도 거의 없었다.

트럼프 정부 내에서는 불평과 불만이 속출했다. 폴리티코는 ”국무부와 국방부의 고위 관계자들은 NSC를 신뢰할 수 없게 되고 시리아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조율이 잘 되지 않는 데 좌절한 나머지 정책 조율을 원활히 하기 위해 별도로 소규모 기관 간 회의를 열 정도였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WP)가 볼턴의 ‘독주’를 심층취재한 기사에 따르면, 당시 매티스 국방장관은 INF 파기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NSC 회의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는 NSC 회의가 부족한 탓에 정책 조정 절차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날선 서한을 볼턴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WP는 ”볼턴이 각 부처의 의견을 트럼프에게 정확히 전달하고, 거꾸로 (볼턴이 트럼프의 의견을 정확하게) 전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는 탓에 몇몇 부처 관계자들은 대통령과 접촉할 별도의 라인을 구축하기도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건 폼페이오”였다.

트럼프도 아슬아슬 선을 넘나드는 볼턴을 어느 정도는 경계했던 것으로 보인다. ”몇몇 정부 당국자들은 볼턴이 정부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아젠다와 일치하지 않는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한다고 트럼프가 종종 불평하며, 중동과 북한에 대한 그의 공개 발언들을 질책했다고 말했다.” WP가 당시 보도했던 내용이다.

 

U.S. President Donald Trump departs the Oval Office following a presentation of the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 to NBA Hall of Famer Jerry West at the White House in Washington, U.S., September 5, 2019. REUTERS/Joshua Roberts ⓒJoshua Roberts / Reuters

 

족쇄 풀린 트럼프? 

주요 외교 정책에서 볼턴은 트럼프와 견해를 달리했다. 올해 여름이 되자 볼턴의 영향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6월 판문점에서 열렸던 트럼프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회담에도 동석하지 않았다.

볼턴의 존재감이 그만큼 희미해지긴 했지만 ‘파괴된 NSC’는 그의 유산으로 남았고, 꽤 오랫동안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평가다. 이건 그리 낙관적인 얘기가 아닐지 모른다.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미국 외교 정책이 혼란으로 빠지는 걸 막아줬던 구조를 해체하고, 마침내 규율 없는 군 통수권자(대통령)의 속박을 풀어준 게 가장 오랫동안 남을 볼턴의 유산이 될 것이다.

(중략)

뉴욕타임스 기고문, 9월 10일)

 

다른 한 편으로 보자면, 볼턴은 트럼프 정부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미국 외교안보 정책의 개입주의 전통을 견지하는 인물이었다. 즉, 미국은 전 세계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퍼뜨리고 이를 수호해야 하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란이든, 북한이든, 이라크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인류에게 자유에 대한 역사상 가장 큰 희망은 미국이며, 따라서 미국의 국익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세계에도 최선이자 유일한 전략이다.” 볼턴이 폴리티코에 했던 말이다. 남들보다 많이 과격해서 비주류에 가깝다는 점만 빼면, 볼턴의 이런 시각은 대체로 역대 공화당 정부의 기조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NYT에 말했다. ”폼페이오는 자신과 대통령 간의 어떤 견해차도 드러내지 않을 것”이므로, ”앞으로 우리는 족쇄 풀린 트럼프를 보게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게 미국을 어디로 이끌게 될지 대체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