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프인터뷰] 작곡가 진은숙이 서울시향을 떠난 이유를 직접 해명하다 -2

2018-01-24     백승호

아래는 “왜 그는 서울시향을 떠났는가?”, “서울시향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 홍형진 소설가가 묻고 진은숙 작곡가가 답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사회 여러 곳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부조리’들의 내막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허프인터뷰] 작곡가 진은숙이 서울시향을 떠난 이유를 직접 해명하다 -1

홍형진 | 그런 성과를 낸 아르스 노바가 도리어 외부 비판의 빌미가 됐다. 서울시의회 등은 관객이 많지 않음을 지적하며 올해 예산을 줄였을 뿐 아니라 상임 작곡가가 서울시향을 위해 곡을 쓰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공연기획자문 겸직으로 더 많은 연봉을 수령했다며 정명훈 예술감독 때와 마찬가지로 ‘특혜’라는 단어를 여기저기서 거론한다. 요약하면 ‘10년 이상 감투를 독점하고선 세금으로 많은 연봉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누가 어떤 자리에 가면 그 자리를 통해 개인적 이득을 취한다'는 인식은 부정부패가 횡행했던 우리 역사가 남긴 잔재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많았고 아직도 꽤 많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한다. 서울시향에서의 일이 나에게는 ‘책임’과 ‘의무’였지만 누군가에게는 ‘권력’과 ‘특혜’인 것이다. 이처럼 인식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에 관해 토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시향이라는 단체에 영입되어 일했고 그 대가로 급여를 받았다. 실제 내 계약 내용을 설명하면 이렇다.

1. 아르스 노바 전반에 걸친 기획과 감독

3. 나의 초상권, 모든 작품에 대한 아시아 초연 또는 한국 초연 독점권을 시향이 가짐

조선일보가 보도한 6000만 원은 아마도 대강의 평균 금액으로 보인다.) 이후 8년간 연봉은 동결됐고,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약 5%씩 인상됐다. 공연기획까지 맡았던 2017년에는 자의로 다시 10년 전 수준인 4만1천 유로로 삭감해달라고 요청했다.

공연기획자문역을 잠시 겸임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 역할은 시향의 부탁으로 맡게 됐고 당시 시향에 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어서 수락했다. 연봉은 약 6만7천 유로였고 1년 반 가까이 일했으며, 앞에서 얘기한 것과 같이 처음 3~4개월 동안은 무보수 자원봉사를 했다. 이 역할은 오케스트라의 모든 음악적 이슈에 대한 총체적 책임을 지기에 막중하다.

홍형진 | 상임 작곡가면서 악단을 위해 곡을 쓰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만일 시향이 신작 초연을 원하면 공식적으로 위촉을 해야 한다. 그럴 경우 최소한 3~4년 전에는 위촉해야 하는데 한국 상황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공동위촉 방식으로 참가한 적은 두 번 정도 있다.

그리고 나는 만일 시향에 그런 예산이 있다면 그건 다른 사람을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재 신작 위촉을 위한 시향의 예산은 상당히 적은 수준인데, 그를 외국 작곡가 두 명과 한국 작곡가 두 명에게 나눠서 위촉하고 있다. 또한 그 위촉 사업은 내가 진행했던 일이다. 내가 나에게 셀프 위촉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 이슈를 쉽게 요약하면 ‘내 계약에는 곡 쓰는 것에 대한 의무가 명시되어 있지 않고, 나는 서울시향이 나에게 작품위촉을 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이다.

홍형진 | 아르스 노바의 수익성에 대한 지적, 그러니까 예산만 많이 들고 관객은 적다는 비판에도 대답해주면 좋겠다.

나는 아르스 노바를 진행하며 한 번도 호객행위를 해본 적이 없다. 지인이나 학생을 동원해 홀을 채우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 같아서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고 유지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의 아르스 노바 관객은 모두 다 자발적으로 그 음악을 들으러 온 진짜 청중이다.

그리고 아르스 노바는 단순히 연주회 하나로 끝나는 사업이 아니다. 마스터 클래스 같은 교육 사업을 포함한 포괄적인 사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렇게 큰 예산이라고 할 수 없다. 여러 회사에서 후원금을 받기도 했다. 항간에는 ‘서울시향이 베토벤, 말러 연주해서 번 돈을 아르스 노바로 탕진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2011년에 목소리를 높인 건 진보 측이다. 당시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갓 취임하던 시기로서 정명훈 지휘자를 ‘이명박의 잔재’로 공공연히 부르는 이도 있었다. 그때 비판을 주도한 서울시 의원은 시간이 흘러 국회의원이 됐다. 반면 논란이 재점화된 2014년에 목소리를 높인 건 보수 측이다. 어느 보수 언론은 서울시향을 보도하며 연일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판했고, 심지어 평양 공연을 거론하며 종북 뉘앙스까지 풍겼다. 시향에서 이런 기류를 느낀 적이 있나?

서울시향을 둘러싼 ‘정치화된 공방’ 속에서 진정으로 이 단체를 위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그 과정에서 얻는 개인적 이득이 정치적 행동의 유일한 목적으로 보인다. 한 오케스트라의 성과나 그 사회에서 갖는 문화적 의미가 단순히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의 업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다. 어느 정당 출신이 시장이 된다 해도 반대파는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홍형진 | 대답 이면에 환멸과 체념이 은근히 녹아 있다. 이런 지루한 정치적 공방을 오래도록 겪으면서 특별히 느낀 점이 있는가?

시향에 대한 논란과 정치적 공격이 시작된 몇 년 전 나는 순진하게도 더 열심히 해서 좋은 성과를 내면 공격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그런데 시향이 이루는 성과가 커지면 커질수록 공격은 더욱더 심해졌다. 공격 대상의 위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를 공격함으로써 얻는 것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진은숙 | 예산을 받아쓰는 입장인 서울시향은 을이 아닌 병이라 할 수 있다. (웃음) 시민의 세금이 제대로 쓰이는지 감사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감사는 전문성과 공정성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그와는 별개로) 예산을 받아 쓰는 기관의 독립성이 보장돼야 한다. 그리고 저 세 기관의 관계는 상하관계가 아닌 평등한 관계여야 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이 이슈에 대한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홍형진 | 서울시향 관련 이슈가 불거질 때면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만 한참 걸린다. 보도된 내용과 업계의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서 알면 알수록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전 대표가 직원들의 인권을 유린했다’는 내용이 오래잖아 ‘정명훈의 사주를 받은 직원들이 반기를 들었다’로 탈바꿈했고, 경찰은 관련 의혹이 전 대표를 음해하기 위한 직원들의 조작이라고 발표했으나 이후 검찰과 법원은 모두 무혐의로 결론 내렸다. 도리어 전 대표만 폭행 혐의가 인정돼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죄다 앞뒤가 안 맞기에 단편적으로 기사를 접한 대중은 진실에서 괴리된 채 염증만 느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서울시향의 이미지는 하염없이 실추됐다. 이를 지켜보며 특별히 느낀 점이 있나? 아울러 서울시향 이슈를 대하는 시민에게 당부하고픈 말씀이 있는지?

진은숙 | 법적 절차가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것이 원칙이라고 알고 있다. 이 이슈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은 재작년에 발표한 글 <진실의 얼굴>에서 다 피력했다. 이 사태는 전 대표와 사무국 직원들 사이의 문제다. 한쪽에선 이랬다고 주장하고 반대쪽에선 아니라고 하고 있으니 법정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면 된다. 유감스럽게도 그동안 일방적인 음모론 여럿이 여론을 장식하면서 단순한 사건이 복잡해졌다. 개인적으로는 힘의 균형이 깨진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빠른 시일 내에 사필귀정이 되기를 바란다.

홍형진 | 작곡가 진은숙에게 서울시향은 어떤 존재인가? 누군가는 '서울시향만 아니면 진은숙은 지금이 가장 행복할 수도 있는 시기'라고 말했다. 작곡계의 으뜸가는 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손꼽히는 거장 작곡가로 자리매김했으며 전 세계의 명문 악단이 작품을 받으려고 줄을 서 있다. 그런 진은숙이 무엇을 위해 유학을 떠난 지 2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것인가?

오랫동안 자국에 자리 잡고 일하는 외국 동료들을 많이 부러워해왔기에 나도 뭔가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한국 출신 음악가로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 국제 음악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12년 내도록 내가 한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시향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 계속된 지난 수년간은 그걸 막아보겠다고 미친 사람처럼 살았다.

항상 시간에 쫓기느라 작품 위촉을 많이 거절했고 내 작품이 연주되는 연주회에 가지 못한 적도 많다. 그런 상황에서 심각한 사춘기 열병을 앓은 아들 때문에 가슴앓이까지 해야 했다. 지금 와서 뒤를 돌아보면 어떻게 저 많은 일을 견뎠나 싶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망하지 않고 작곡가로 살아남아 있는 것이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웃음) 이만큼 시향은 지난 12년간 내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존재였다.

홍형진 | 한국에서 12년간 일하면서 특별히 느낀 점이 있나? 서울시향을 둘러싼 각종 논란 이면에는 정치, 언론, 사회 등을 망라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가 깔려 있다고 보기에 묻는다. 외국과 한국 양쪽에서 동시에 활동해온 당신의 시선이 궁금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자유가 없다는 것이 힘들었다. 누군가에 대한 객관적인 의견을 얘기해도 그 순간 나는 ‘~빠’ 내지 ‘그와 이익을 공유하는 사람’으로 분류되고, 그 순간부터 그의 적이 몽땅 내 적이 되어버린다. 공적인 차원에서 이뤄져야 할 문제 제기나 비판도 항상 감정적 차원에서 비상식적으로 행해지고, 비판하는 사람은 비판의 대상을 마치 원수 대하듯이 개인적 원한을 가지고 파멸시키려고 한다. 게다가 공격의 대상이 된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왕따(Persona non grata) 취급을 받는다. 그가 옳다는 것을 알 때조차 누구도 그를 변호하지 않는다. 그의 적이 자신의 적이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서 정도가 지나치다.

홍형진 | 우리 사회에 만연한 ‘모욕주기’ 문화에 대한 일침으로 들린다. 사실 음악계 내막에 밝은 이들은 시향 이슈를 접할 때마다 어떻게 저런 모욕감, 모멸감을 견딜 수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이 뉴스는 그냥 웃고 넘어갔지만 그 외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수도 없이 찾아오는 모멸감을 참아야 했고 아무 잘못 없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감에 항상 시달렸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작품 쓸 때 나 스스로가 벌레같이 느껴진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나를 벌레 취급해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 걸까? (웃음)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시향을 떠난 지금의 나에겐 그 시간이 너무도 충만하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많은 분이 나의 활동을 성원해줬고 단원들과 같이한 연주회는 잊을 수 없는 감동과 기쁨의 순간이었다. 견디기 힘들었던 시련조차도 나를 강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경험으로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는 나에게 정신적 고통을 준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홍형진 | 이번 사임을 계기로 당분간 해외에서 작곡에 전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로서는 그것이 서울이나 한국과의 완전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서울시향, 나아가 한국 음악계 전반을 위해 남기고픈 이야기가 있나? 당신과 시향을 아끼고 감사해 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

이제 시향을 떠났고 내년이면 자녀도 성인이 되어 분가하니 앞으로의 내 인생은 완전히 나만의 것이다.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책임과 의무, 그리고 문제들로부터 해방되고 완벽하게 자유로운 삶이 내 앞에 펼쳐진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기쁘다. 현재 작곡 스케줄이 2023년까지 차 있고 이제부터는 오로지 작품에만 전념하며 살고 싶다. 작곡가로 좋은 작품을 내놓는 것이 한국음악계를 위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한다.

1980년대에 이란의 최고 통치자 호메이니가 인도의 작가 살만 루슈디를 살해하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한 적이 있다. 루슈디가 자신의 작품에서 아슬람을 모욕했다는 게 이유다. 며칠 후 그 작품을 번역하겠다고 언론과 인터뷰한 일본 작가가 자객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러자 세계의 어느 누구도 그의 작품을 출판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그 책의 번역본이 출판될 수 있었다. 수백 명의 문인이 똑같이 법적인 책임을 지는 발행인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힘을 합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끔찍한 살해의 위협까지도 물리칠 수 있다.

서울시향이 이 과도기를 잘 극복하고 발전해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지난 12년간 쌓아온 성과가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올해 공연 계획은 이미 탄탄하게 짜여 있고 2019년 공연 계획도 작년에 어느 정도 라인업을 갖춰뒀다. 두 수석 객원 지휘자가 담당하는 연주회의 모든 디테일도 계약이 종료되는 2019년 말까지 다 완성되어 있다. 따라서 빠른 시일 내에 안정을 찾으면 크게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크게, 넓게 보고 한마음으로 해나가면 더욱 발전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과도기에 좀 더 도움이 되기를 바랐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어 유감이다.

Alea jacta est!) ! 결정이란 그것이 내려지는 순간에는 좋은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 후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좋은 결정이 될 수도, 나쁜 결정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나도 인생을 살며 많은 결정을 내려왔고, 그중에는 남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도 그것이 좋은 결정이 되도록 늘 노력했고, 현재의 내 삶은 그 결정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이 결정이 좋은 결정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니 서울시향도 내가 떠나는 이 결정이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들에게 좋은 결정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앞으로 모든 것을 잘 해내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