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치 철새를 추락시킨 공주님의 진실

헌정질서를 깡그리 부정한 신군부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였으며, 부패와 비리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야가 다투어 찾으며, 보수와 진보를 넘나든 김종인씨의 이런 화려한 정치 경력을 살펴 보면서 역시 정치적으로 해방 후 우리나라 못지 않은 극심한 혼란과 부침을 겪었던 프랑스 대혁명기 무렵 맹활약한 프랑스 정치인 푸셰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어찌 보면 데칼코마니처럼 김종인씨와 닮은 푸셰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2016-02-01     바베르크

김씨가 입안했다고 주장하는 헌법 제119조 제2항의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을 들어 "경제민주화님의 입당"이라고까지 선전하고 있다. 또한 김종인씨는 지난 대선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일하며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면 이른바 경제민주화 관련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어 여당이 중도층의 표심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정작 박근혜 대통령 당선 후에는 소위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김종인씨의 더민당 영입은 이번 4월 13일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더민당으로 하여금 경제민주화 의제를 선점하게끔 하여 더민당이 국민의당과의 제1야당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하였다는 관측들이 보인다.

김종인씨는 실은 광주학살을 자행한 직후에 독재자 전두환이 만든 초헌법적, 초법적 기구인 소위 국보위에 가담하는가 하면, 신군부의 5공 및 6공 정권에서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며 독재정권에 부역하여 왔다. 또한 김씨는 김영삼 정부 때는 동화은행 사건과 관련하여 2억원대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는가 하면, 1996년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부패 및 비리 전력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인씨는 진영을 바꾸어 반(反)노무현계 야당인 새천년민주당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 및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냈는가 하면, 한때는 안철수 의원의 멘토로 불리기도 했고, 앞에서 보았듯이 박근혜 정권 탄생에 기여를 하였고, 이번에는 또 다시 진영을 넘어 더민당에 가담했다.

헌정질서를 깡그리 부정한 신군부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였으며, 부패와 비리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야가 다투어 찾으며, 보수와 진보를 넘나든 김종인씨의 이런 화려한 정치 경력을 살펴 보면서 역시 정치적으로 해방 후 우리나라 못지 않은 극심한 혼란과 부침을 겪었던 프랑스 대혁명기 무렵 맹활약한 프랑스 정치인 푸셰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어찌 보면 데칼코마니처럼 김종인씨와 닮은 푸셰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김종인씨는 이번에 비례대표를 더민당 대표라는 문재인씨에게서 보장받아서 임기를 마치면 81세(!)가 된다는데 그와 평행이론이라 할 만한 정치역정을 지냈던 푸셰는 어떤 말로를 보였을까? 그것이 오늘의 주제가 되겠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1월 31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참배를 앞두고 5·18 정신실천연합 회원들로부터 과거 국보위 전력을 비난받고 있다.

1. 수도원 부설 학교 교사에서 온건파 정치인으로

2. 국왕 시해자에서 리옹의 도살자이자 빨갱이로

"개종한 사람보다 더 열렬한 신앙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는 말에 어찌 보면 딱 맞는 예가 푸셰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국왕시해(弑害)에 찬성하며 프랑스 대혁명기의 과격파에 가담한 푸셰는 이제 극좌파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는 당시 로베스피에르 독재의 집행기구였던 공안위원회의 명령을 받아 리옹에 파견되자 동료인 콜로 데르부와와 함께 교회를 약탈하고 보수적인 반혁명 세력들을 처형하는 일에 앞장선다. 당시에 푸셰가 반혁명세력들의 재산을 압수하며 발표하였던 포고문들을 두고 푸셰의 전기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세계 최초의 공산당선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수도원 부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온건파 정당 출신 의회 의원이었던 자의 극적인 정치적 입장 변경이었다.

3. 다시 반동(反動)의 앞잡이가 되는 푸셰

로베스피에르를 실각시키는 테르미도르 반동을 꾸며낸다.

4. 나폴레옹 황제를 모시는 신하가 된 푸셰

그러나 불세출의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은 자신의 황후마저 과거에 정보원으로 썼었던 음모와 배신의 화신 푸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푸셰를 제거하려고 하다가 거꾸로 역습을 당했던 로베스피에르의 예를 잘 알고 있었던 나폴레옹은 푸셰를 조심스럽게 다루었고 이제 자신이 황제가 되어 국정이 안정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경무대신이 필요하지 않다는(즉 푸셰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경찰을 담당하는 대신 장관 자리 자체를 없애 버리는 방법으로^^) 푸셰를 은퇴시킨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실패로 궁지에 몰린 다음에도 푸셰가 자신에 대항하는 음모에 가담할 것을 염려하여 중요하지 않은 외국의 대사 같은 자리들로 빙빙 돌리는 바람에 나폴레옹이 망하고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복위하는 왕정복고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모사꾼 푸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Joseph Fouché (1759-1829) © commons.wikimedia.org

5. 부르봉 왕가의 신하가 된 푸셰

그러나 푸셰는 언제나 자신이 모시겠다고 한 주군(主君)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앞에 둔 이였기 때문에, 복귀한 황제 나폴레옹을 모시는 척하면서도 뒤로는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유럽 구체제의 군주들 및 재상들과 거래를 계속하였다. 결국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퇴하자 푸셰는 나폴레옹을 쫓아내고 부르봉왕가의 루이 18세의 복귀를 가능하게끔 한다. 루이 18세의 형인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동하였던 이가 푸셰였음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역사의 희비극이 아니었나 싶다. 루이 18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부인과 사별한 후 다시 처녀 장가를 간 푸셰를 위한 결혼식 증인이 되어주기까지 하였으니 변화무쌍한 프랑스 혁명기, 나폴레옹 시대, 왕정복고기를 잘 헤쳐나온 푸셰의 만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나 싶었다.

6. 푸셰의 몰락을 가져 온 어느 소녀의 기억

앙굴렘 공작부인은 비열한 푸셰가 이렇게 뻔뻔스럽게 잘 나가는 상황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녀는 푸셰가 참석하는 행사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파티가 되었건, 국왕이 주최하는 행사가 되었건 국왕 루이 18세의 조카딸인 앙굴렘 공작부인은 푸셰에게 초청장이 갔는지, 푸셰가 오는지 확인해 보고 푸셰의 참석이 확인되면 참석을 거부했다. 부모와 남자 형제를 잃고 혹독한 망명생활 끝에 돌아 온 앙굴렘 공작부인의 이런 태도는 곧 널리 알려졌다. 그러자 당시 프랑스 귀족들은 앙굴렘 공작부인을 따라 푸셰가 나타나는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석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푸셰는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국왕 루이 18세마저 조카딸의 이런 뜻을 받아 들여 푸셰가 오는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고, 푸셰의 인사를 받기도 거절하기 시작한다.

푸셰는 몰락했다.

이렇게 쫓겨난 푸셰는 망명했고, 비참한 생을 영위하다가 죽었다. 루이 16세도, 로베스피에르도, 나폴레옹도, 루이 18세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 소녀의 기억이 이루어낸 것이다.

7. 그렇다면 김종인씨는?

독재정권에 충성을 다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딴소리냐는 볼멘 목소리가 없지가 않지만, 왕정복고기의 주권자인 국왕이 조카딸인 앙굴렘 공작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푸셰를 찍어냈듯이, 김종인씨의 운명도 결국 이번 총선거에서 주권자인 국민들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