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오늘 북한은 당 창건 70년을 기념할까?

이제 3대 세습이라는 전세계에서 웃음거리가 되었고, 공산주의 역사 속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을 저지른 북한의 김씨 왕조는, 오늘 자신들의 독재의 수단인 북한의 집권당 조선노동당이 창건 70주년을 맞았다고 기념함으로써, 70년 전인 1945년 10월 10일 김정은의 할애비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었던 것이 실은 남북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려는 민족사적 범죄행위를 저질렀던 사건이라는 것을 스스로 만천하에 실토하는 것이라 하겠다.

2015-10-10     바베르크

191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인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다음, 공산주의를 세계 다른 나라들에 퍼뜨리는 일을 맡았던, 소련의 대외정책 도구인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은 "1국 1당 원칙"에 의하여 하나의 나라에는 공산당이 하나밖에 없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하여 왔다. 그러기에 일제시대 상당수의 조선 공산주의자들은(나라가 없었으니ㅜㅗ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파시즘과 맞서면서 영미(英美)와 손을 잡으며 "호의의 표시로" 코민테른을 해체하기는 했지만, 코민테른 때 만들어진 "1국 1당 원칙"은 엄연히 살아 있는 상황이었으나 당초부터 소련 군정(軍政)과 김일성 일파는 자신들이 장악한 지역에 소련의 위성국가를 세운다는 또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먼저 공산당부터 별도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1국 1당 원칙"에 반하지 않는다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 바로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의 북조선분국(分局)이라는 형태를 취하여 북한에 사실상 독립된 공산당을 하나 더 별도로 만들었던 것이다.

중국의 독재자 모택동마저도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던; 지엄한ㄷㄷㄷ 스탈린의 의중이 반영된 것인지라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된 지 불과 두 달여만에 이렇게 소련 군정과 김일성 일파에 의하여 분단의 씨앗은 이미 뿌려진 셈이다. 그리고 박헌영이 일단 조선공산당이 이렇게 갈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뒷날 결국 김일성의 손에 죽게 되는 그의 비극적 운명의 전조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은 느낌적 느낌이기도 하다.

북한의 농지개혁은 남한에도 강력한 선전효과를 보였으나 남한이 6.25 직전에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으로 농지개혁을 가까스로 실행하는 바람에 러시아, 중국, 남베트남에서처럼 공산측으로 정세를 극단적으로 유리하게 만드는 이벤트로 작용하지 못했다. 또한 북한은 이렇게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했던 농지를 다시 국유화하여 집단 농장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북한이 농지개혁을 실시하면서 주장했던 "토지는 밭갈이 하는 자에게"란 것은 정말 사탕발림 구호에 그쳤고 농민들은 국가를 지주로 하는 소작제에 다시금 얽매이게 된 셈이라고 하겠다.

그러자 북한의 이런 움직임에 주목했고 아마도 당시 남한 정치인들 중 미소냉전의 본질을 유일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그렇다고 해서 훗날 독재자로 귀결되고 마는 이승만이 정의냐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이승만이 1946년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릴 게 아니라 남한도 통일에 앞서 임시로 무슨 위원회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른바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의 운을 띄운다.

이런 비극을 막으려고 했던 움직임이 바로 여운형 선생님과 김규식 선생님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운동이고 그 좌우합작운동이 실패-_-한 다음에는 김규식선생님은 김구선생님과 함께 분단을 막으려는 마지막 시도로 북한의 김일성과의 남북협상을 추진하나 이 역시 북한정권의 선전에만 이용;당하고 만다.

결국 한반도 문제는 유엔이 결정하게 되는데 당시 유엔은 대만이 유엔에서 쫓겨난 1970년대초와는 달리 미국의 영향력이 압도적인 시절이라 미국도 사실상 분단을 감수하겠다는 결정이었다. 한반도 전체에서의 총선거를 위한 유엔감시단 입국을 소련 군정과 북한이 막은 것은 이 상황에서는 필연적 귀결이었고.

일단 의회라는 것이 이렇게 만들어지고 나면 자체의 동력을 지니게 되는 것인지 선거를 보이코트했던 남한의 정치세력들은 급속히 몰락했고 당초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중간파 인사들(안재홍, 조소앙 등)은 2년 후 열린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거 참여하여 대한민국을 인정하게 된다. 이후에도 남한에서 선거를 보이코트한 세력들은(85년의 2.126. 총선 때의 동교동계 일부 세력) 정치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 제헌의회를 해산시키기는 했으나(쿨럭;) 짜르가 만든 가짜 의회인 두마라도 들어가서 싸우라며 "돼지 우리에서라도 싸우라"고(응?) 한 레닌의 말처럼 의회의 중요성은 남한에서도 첫번째 총선에서부터 두드러진 셈이다. 남한의 제헌의회는 총선이 실시되지 못한 북한지역을 위해서 100석의 의석을 남겨 두었다. 이제 대한민국 국회는 더 이상 그런 상징적 조치조차 취하지 않지만-_-; 국토가 마악 분단된 그 시절만 해도 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나 싶어 분단 70년째를 보내고 있는 입장에서는 좀 비감해지는 것이다;

남한이 유엔결의와 총선을 통해 북한에 대항하기 위한 단독정부 수립 절차를 밟아가자 분단의 책임을 남한에 뒤집어 씌우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우선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은 앞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그간 팥다발 같은 비난을 퍼부어 온 남한의 김구선생님과 김규식선생님께 민족 분단을 막을 마지막 기회라며 '남북협상'을 하자며 북한으로 두 분을 초청하고, 그간 북한 곳곳에 있던 두 분을 비방하는 선전물들을 황급히 철거하고 지우느라 난리를 피운다. 김구선생님과 김규식선생님은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성의를 김일성이 보여 줄 것을 기대했고 독립운동의 동지이기도 했고 북한으로의 초청장을 김일성과 연명으로 보냈던 김두봉의 선의에도 기대했지만 두 분 선생님을 오로지 남한 단독정부 수립보다 북한이 늦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만 활용하려고 했던 김일성이었는지라 (즉 김일성은 전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식의 남북협상은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북한 지역에서의 '선거'도 흑백 투표함 '선거' 즉 사실상 공개투표로 진행되었고. 이렇게 선의를 가진 애국지사님들을 그저 선전용으로만 이용해 먹고 가짜 선거로 민의를 조작해서 자기네 편 인사들로만 정부를 구성하여 김일성이 1948년 북한정권 수립을 선포했던 것이었다. 그런 김일성의 민족사적 범죄행위에 알게 모르게 가담했던 김두봉이나 박헌영 같은 이들마저 김일성은 모조리 숙청했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과 손자대에 세습까지 시키고 있으니, 아마도 북한정권 수립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던 당시의 소련측 인사들마저도 지금과 같은 기괴한 북한 정권의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3대 세습이라는 전세계에서 웃음거리가 되었고, 공산주의 역사 속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을 저지른 북한의 김씨 왕조는, 오늘 자신들의 독재의 수단인 북한의 집권당 조선노동당이 창건 70주년을 맞았다고 기념함으로써, 70년 전인 1945년 10월 10일 김정은의 할애비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었던 것이 실은 남북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려는 민족사적 범죄행위를 저질렀던 사건이라는 것을 스스로 만천하에 실토하는 것이라 하겠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인 10일 0시(남한이 표준시로 사용하는 동경시 기준 0시 30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참배에는 김기남·최룡해·최태복·김양건·곽범기·오수용·김평해 당 비서를 비롯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 일꾼들이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