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사람들은 백과사전 대신 AI(인공지능)에게 묻는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책장을 넘기는 대신 질문을 입력하고, AI는 순식간에 답을 내놓는다.
'마음의 양식'이라 불리며 인간의 지식과 교양을 쌓는 데 쓰였던 책이 이제는 인공지능(AI)을 학습시키는 데이터로 활용되고 있다. AI가 수많은 책을 학습하며 똑똑해지는 동안, 정작 그 책을 쓴 작가와 번역가, 편집자와 출판사에는 무엇이 돌아갔을까.
노벨문학상 발표를 하루 앞둔 7일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 후보 작가들의 서적을 모아둔 코너를 마련해 두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과 독일 출판계가 바로 이 질문을 던지며 AI 기업과 각국 정부를 향해 한목소리를 냈다.
한국출판인회의는 10월 '책이 없으면 AI도 없습니다(No Books, No AI)'라는 제목의 '정부·국회·AI 기업에 보내는 대한민국 호소문'을 발표하고 출판계 안팎의 연명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16일 오후 4시 기준 호소문에는 단체 172곳과 개인 348명이 연명에 참여했다.
한국출판인회의는 호소문에서 "생성형 AI는 책들을 통해 발전하고 있고, 한 권의 책 뒤에는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담겨 있다"며 "작가가 공들인 문장, 번역자가 고른 단어 하나, 편집자가 다듬은 원고. 이 과정들이 모여야 비로소 책이 세상에 나온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책이 AI 학습에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는지 정작 권리자들은 알기 어렵다는 데 있다.
한국출판인회의는 "책을 만든 사람들은 자신의 작품이 언제, 어떻게, 어느 AI에 쓰였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며 "알 수 없으니 묻지도, 거절하지도,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지도 못한다"고 지적했다.
출판계가 요구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AI 학습 데이터의 투명한 공개, 권리자의 이용허락 원칙 확립, 정당한 보상이다.
우선 AI 기업에는 "학습 데이터의 출처를 밝혀야 한다"며 "학습에 이용한 작품과 그 출처, 적법한 이용 근거를 기록하고, 권리자가 이를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정부와 국회를 향해서는 "거부 의사를 따로 밝히지 않았다고 해서 이용을 허락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며 "산업 육성을 명분으로 창작자의 권리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촉구했다.
보상 문제도 빼놓지 않았다. AI 기업에 "출판물의 권리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며 "협상력이 약한 중소 출판사와 개별 창작자도 공정한 조건에서 협상하고 보상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출판인회의는 "우리는 기술을 거부하지 않는다. AI와 출판이 함께 발전하기를 바란다"며 "그 답이 창작자, 출판사와 AI의 상생에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한국 출판계의 움직임은 독일에서 먼저 발표된 '프랑크푸르트 호소문'에 뜻을 함께한 것이다.
독일출판서점협회는 지난 6일(현지시각)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을 앞두고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와 유럽의회, 독일 연방정부를 향해 '생성형 AI – 출판사에는 데이터 투명성과 실효성 있는 법적 집행 수단이 필요하다'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협회는 AI 기업들에 "출판사와 저자의 동의 없이 저작권 보호를 받는 저작물로 모델을 학습시키고, 가치 있는 상품을 아무런 대가 없이 이용하고 있다"며 "권리자가 권리 유보를 명시했음에도 이를 불법적으로 무시하고도 지금까지 대체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특히 AI 기업들이 학습에 사용한 저작물을 공개하지 않는 현실을 강하게 문제 삼았다. 협회는 "생성형 AI 모델 학습에 어떤 저작물을 구체적으로 사용했는지 공개하는 게 기술적으로 가능한데도 하지 않는다"며 "그 결과 투명성이 부족해 유보된 권리를 행사하려면 다국적 기업을 상대로 부담스러운 소송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충분한 정보가 없으면 권리자는 자신의 저작물이 사용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어 침해 가능성을 입증하는 데 있어 엄청난 장애물에 부딪히게 된다"고 밝혔다.
협회는 권리자들이 처한 현실에 관해서도 "먼저 정황 증거를 모으는 어려운 작업을 해야 한다"며 "그런 다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AI 기업들을 상대로 대개 길고 비용이 많이 드는 소송을 벌여야 한다"고 꼬집어 말했다.
그러면서 "그 결과 현재 침해에 대해서 아무 대가도 부과되지 않고 수익은 출판사, 저자, 일러스트레이터, 번역가의 희생 위에서 오로지 AI 기업에게만 돌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협회는 EU와 독일 입법자들에게 세 가지 조치를 요구했다. 첫째는 AI 학습 데이터의 저작물 단위 공개다. 협회는 "AI 기업의 투명성 의무에는 실제 사용된 학습 데이터를 저작물 단위로 공개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며 "현재 AI 제공자에게 적용되는 지침은 권리자의 배타적 권리 행사 개선을 목적 가운데 하나로 명시한 EU AI법(EU AI Act)의 요구 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고 지적했다.
둘째는 정당한 보상이 이뤄지는 라이선스(사용권) 시장 구축이다. 협회는 "공정한 수익 모델을 갖춘 라이선스 시장이 개발되어야 한다"며 "현재 AI 제공자들은 텍스트·데이터 마이닝(TDM) 예외 조항을 근거로 내세우며 보호 저작물을 이용하고 대가 지급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셋째는 저작권을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법적 집행 수단 마련이다. 협회는 "유럽 저작권법 전반이 준수되어야 하며, 강력한 집행 수단을 갖추어야 한다"며 "침해해도 아무런 결과가 따르지 않는 권리는 무의미하다"고 강조했다.
한국과 독일 출판계가 던진 질문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책을 통해 AI를 똑똑하게 만든 기업이 정작 그 책을 쓰고 만들어낸 사람들의 권리와 노동은 외면해도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