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나비 필라이 전 유엔인권최고대표가 국제형사재판소(ICC)를 제재한 미국을 규탄했다.
앞서 미국 정부는 9일(현지시각) ICC에 대한 고강도 제재를 발표하면서 동맹국에도 ICC 견제에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의 제재로 미국 관할 지역에 있는 ICC의 모든 자산은 동결되며, 미국의 모든 기업과 개인은 6개월 내로 ICC와 거래를 중단해야 한다.
나비 필라이 전 유엔인권최고대표 ⓒ 연합뉴스=UPI
11일 외신 등에 따르면, 나비 필라이 전 유엔인권최고대표는 10일(현지시각) 오슬로 노벨평화센터 행사에서 한 화상연설을 통해 "ICC의 존속 여부를 두고 엄청난 긴장과 불안이 조성됐다"며 "단지 판사들이 내린 사법 명령을 이유로 한 국가(미국)가 제재를 발표했는데 이는 전례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 나비 필라이 전 대표는 남아공 최초의 유색인종 여성 판사, ICC 판사,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의 수장인 제2대 유엔 인권최고대표(UN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를 지냈다. 국제 형사 정의를 실현하고 법치주의를 통해 인권을 수호한 공로를 인정받아 9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필라이 전 인권최고대표의 수상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을 통해 ICC에 대한 전면적인 제재를 단행했다. 트럼프 정부는 비가맹국인 이스라엘에 대한 ICC의 수사를 비판해 왔는데, ICC 판사 출신인 필라이의 수상에 반발해 보복성 제재 타이밍을 잡았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의 제재에 대해 국제사회에서는 비판 메시지가 쏟아졌다.
ICC는 10일 이번 조치가 "법치주의와 국제 법질서의 근간에 대한 공격"이라고 규탄했다. 도모코 아카네 ICC 소장은 "법원이 사법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시도는 용납할 수 없다. 이번 제재는 ICC를 설립한 주권 국가들에 대한 공격이다"라고 말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도 깊은 유감을 표명하며 ICC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재확인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미국의 제재를 무력화하기 위해 제3국이 부과한 제재를 따르지 않도록 하는 '차단 규정(Blocking Statute)' 발동을 요청했다. 영국, 캐나다, 덴마크, 일본 등도 성명을 내고 우려를 표명했다.
앞서 ICC는 2024년 11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과 관련해 전쟁범죄 및 인도에 반하는 범죄 혐의로 벤야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등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5년 2월 정당한 근거 없이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권력을 남용했다는 등의 이유로 ICC 직원들에 대한 금융 및 비자 제재를 가능하게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번 미국 정부의 제재는 그 대상을 ICC 직원에서 기관 자체로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