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반포 580돌이자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은 9일 세종대왕이 공공기관 누리집(홈페이지)에 접속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첫 화면에는 'HOME', 궁금한 게 있어 'Q&A'를 눌렀더니 'FAQ'가 나온다. 다른 기관을 찾아보려니 'FAMILY SITE'를 클릭해야 한다. 분명 한국 공공기관 누리집인데 정작 한국어는 뒷전이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하루 앞둔 10월8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한 가족이 훈민정음 서문이 새겨진 석판을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로 공공기관 누리집 73곳 중 무려 71곳(97%)에서 한글 설명 없이 영어 약어 등 외국 문자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9일 한글날을 맞아 눈길을 끄는 연구 결과가 있다. 김태경 한양대학교 창의융합교육원 부교수와 백경미 서정대학 한국어과 조교수가 지난 9월 한글학회 학술지 '한글'에 게재한 연구다.
연구팀은 지난해 4월부터 12월까지 경기도와 시군, 산하 공공기관, 관세청 등 73곳의 누리집을 살펴봤다.
영어 사용 1등은 환경과 사회, 지배구조 관련 경영을 의미하는 'ESG 경영'이었다. 무려 225회 등장했다. 뒤이어 Q&A(127회), SNS(94회), CI(87회), FAQ(55회) 순이었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하루 앞둔 10월8일 대구 달서구 삼일야간학교에 한 만학도가 한글 공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책 이름은 더 어려웠다. 'ITS 구축구간', 'DRT 사업'처럼 영어 약어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이름도 등장했다.
'코워킹스페이스', '오픈이노베이션', '규제샌드박스'도 빠지지 않았다. 각각 '협업 공간', '개방형 혁신 전략', '규제 유예 제도'라는 우리말로 바꿔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영어만 문제는 아니었다. '관급자재', '영조물'처럼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한자어도 기관 40곳에서 722회 사용됐다. '관공서가 지급한 자재', '공공시설물'이라고 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훈민정음 반포 580돌,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하루 앞둔 10월8일 서울 광화문 외벽에 한글날 기념 미디어파사드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연합뉴스
시민들의 생각은 어떨까. 연구팀이 경기도민 7975명에게 물었더니 '매니페스토', '코워킹스페이스', '오브제' 등 일부 표현에 관해서는 80% 이상이 개선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는 분명했다. 누구나 쉽게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580여 년이 흐른 지금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공공기관의 누리집에는 'ESG', 'ITS', 'DRT' 같은 영어 약어가 넘쳐난다. 시민에게 정보를 쉽게 전달해야 할 공공기관이 오히려 새로운 언어 장벽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한글은 창제 시기와 원리가 명확히 알려진 세계적으로도 드문 문자다. 그러나 정작 시민들이 이용하는 공공기관 누리집에는 뜻을 알기 어려운 영어 약어가 넘쳐난다. 한글날을 맞아 한글의 우수성을 되새기는 것뿐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 사용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훈민정음 반포 580돌,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하루 앞둔 10월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한글날 전야제 행사에서 대붓으로 '내 곁에 한글'을 적는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