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역은 사전 예방접종만으로도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는 감염병이지만, 백신 접종률이 떨어지면서 연쇄 감염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접종률이 낮은 종교·공동체를 중심으로 집단발생이 반복되면서 미국의 홍역 재유행을 둘러싸고 종교계와 학계, 종교계로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홍역 백신 접종. ⓒAP=연합뉴스
미국 뉴욕주는 홍역 확산을 이유로 5일(현지시간) 주 전역에 재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고 외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뉴욕주에서 올해 들어 홍역 확진자가 잇따른 데 따른 조치다. 10월3일 기준 뉴욕주의 누적 확진자는 108명으로 집계됐으며, 이 가운데 92명은 올해 7월15일 이후 백신 접종률이 낮은 농촌 지역에서 발생했다.
홍역 확산세는 뉴욕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접한 펜실베이니아주에서는 누적 확진자가 1천 명을 넘어섰고, 올해 들어 5명이 숨지고 198명이 입원했다. 미국 전역에서도 10월1일까지 3887명의 홍역 확진자가 보고됐다. 이는 1991년 이후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미국이 홍역 퇴치를 선언한 2000년 이후에도 보기 드문 대규모 유행이다.
홍역은 전염력이 매우 강하지만 예방접종을 통해 확산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지역사회에서 약 95% 이상이 면역을 갖춰야 집단면역이 형성돼 홍역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결국 이번 유행의 핵심에는 백신 접종률 하락으로 인한 면역 공백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미국 홍역 대유행의 또 다른 축... 접종률 낮은 교회 공동체
슬라브계 복음 주의 교회 '진리의길 교회(Way of Truth Church)' 전경. ⓒ페이스북
이번 홍역 유행에서 특히 주목되는 곳은 접종률이 낮은 종교 공동체다. 아미시 공동체를 비롯해 일부 슬라브계 복음주의·오순절 교회 등에서는 감염자가 교회 예배와 모임에 참석한 뒤 다수의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한 사례가 확인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인먼의 슬라브계 복음주의 교회인 '진리의길 교회(Way of Truth Church)'다. 2025년 11월 해당 교회에서는 홍역에 감염된 신도가 11월7일 저녁과 같은 달 9일 오전 예배에 참석하며 백신을 맞지 않은 교인들이 대거 홍역에 노출됐다. 이후 이 교회와 관련된 홍역 감염자는 최소 30명으로 늘었다.
당시 주 보건당국이 2025년 12월2일 새롭게 확인한 홍역 환자 14명 가운데 8명이 해당 교회에서 노출된 것으로 파악됐고, 일주일 동안 16명이 추가로 감염됐다. 이후 방역당국의 역학조사 과정에서는 'Tabernacle of Salvation Church', 'Ark of Salvation Church', 'Slavic Pentecostal Church of Spartanburg' 등 다른 슬라브계 교회에서도 홍역 노출 사례를 확인했다.
AP 등 다수 현지 매체는 "감염 증상이 있는데도 예방 접종을 거부하고 예배를 강행해 수십 명이 연쇄 감염됐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두드러진다고 지적했다.
◇ 백신 거부... 과학·정부에 대한 반감과 '극우 정치'가 겹쳤다
이처럼 미국에서 일부 보수 종교 단체 회원들이 백신 접종을 꺼리는 현상은 단순히 종교적 신념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공중보건 당국과 과학계, 주류 언론에 대한 불신에 더해 낙태와 백신의 연관성을 둘러싼 윤리적 논란, 정부에 대한 반감, 보수 정치와 결합한 반엘리트 정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부 백신의 개발·연구 과정에서 과거 낙태된 태아에서 유래한 세포주가 활용됐다는 사실을 두고, 일부 보수 기독교인들은 이를 '백신 접종'과 '낙태 찬성'을 동일한 것으로 확대 해석하며 백신 거부의 명분으로 삼았다.
이 같은 백신 회의론은 보수 정치와도 맞물리는데, 공공종교연구소(PRRI)의 2024년 조사에 따르면 백인 복음주의 개신교도의 80%가 공화당 지지자 또는 공화당 성향으로 분류됐다.
공화당 지지층에서는 정부와 전문가 등 엘리트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하려 한다는 인식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반엘리트 정서는 CDC(질병통제예방센터)와 FDA(식품의약국) 등 연방 보건기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우파 미디어와 SNS를 통해 반백신 담론이 확산되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 트럼프의 '백신 권장'과 '백신 의심' 사이... 혼란 키우는 메시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이 2026년 8월10일 미국 수도 워싱턴DC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아동 백신 접종과 관련한 새로운 행정 명령에 서명하기 전 취재진을 향해 설명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백신을 둘러싸고 내놓는 메시지는 혼란을 더욱 키우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홍역 예방을 위해 MMR(홍역·유행성이하선염·풍진) 백신 접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 역시 MMR 백신이 홍역 예방에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8월 행정명령을 통해 "MMR 혼합백신은 함께 맞으면 상당히 치명적일 수 있다"며 "따로 맞으면 전혀 치명적이지 않고 매우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현재 미국에서 홍역·유행성이하선염·풍진을 각각 예방하는 단일 백신은 시판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트럼프 대통령의 권고를 사실상 실행 불가능한 셈이다. 여기에 더해 CDC는 "MMR을 분리해 접종할 과학적 이점을 입증한 논문은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를 두고 백신 접종을 권고하면서도 백신에 대한 의구심을 키워 보수 교회 등 백신 회의론이 강한 부모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적 줄타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대해 앤드루 레이신 미국소아과학회(AAP) 회장은 "홍역 사례가 3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시점에 이번 행정명령은 실망스럽고 위험하며, 오해의 소지가 있는 주장을 퍼뜨려 접종률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