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대 대법원장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역대 대통령도 결과적으로 전부, 끝내는 다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존중해왔다"고 강조했다.
대법관 제청은 헌법이 대법원장에게 부여한 권한인 만큼 대통령이나 국회가 이를 좌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면서 차량에서 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역대 정부에서 발생한 대법관 인선 갈등이 풀린 과정을 살펴보면 조 대법원장의 언급과 차이가 난다. 대법원장이 대통령의 뜻을 존중해 한발 물러서거나, 대통령이 대법원장의 뜻을 받아들이는 대신 사법부 개혁을 위한 조치의 한걸음을 내딛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조 대법원장의 '대통령 무시'가 헌정사상 유례 없는 대법관 공백의 장기화로 이어졌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7일 정치권 안팎의 움직임을 종합하면 대법관 재제청을 둘러싼 여권과 조희대 대법원장 사이의 공방이 해결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조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대응책을 고심하는 모습이다.
김민석 민주당 대표는 이날 유튜브 방송 '민티07'에서 조 대법원장을 향해 "그런 문제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만두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조 대법원장과 관련해 불거진 부적절한 업무추진비 사용 논란을 두고 "그것 역시 재제청 문제를 처리하지 못해 나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 거부에도 불구하고 재제청에 선을 그은 조 대법원장을 향해 탄핵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재명 대통령이 조 대법원장의 막무가내식 고집에 숙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성윤 의원은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민과 헌법을 무시하는 조 대법원장에게 이제 남은 길은 사퇴와 탄핵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국회 법사위원인 박균택 민주당 의원도 같은 날 CBS라디오 뉴스쇼에서 "국민이 국가원수로 뽑은 대통령이 헌법 규정에 따라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최고법원 구성권을 갖는 것인데 조 대법원장 비위를 맞추기 위해 대통령이 고개를 숙여줄 순 없다"며 "조 대법원장이 공백 상태를 유지하면서 (재제청을) 거부하겠다면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임명권 조항을 거부하는 것이고 헌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탄핵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이 강경한 대응 기조를 유지하는 배경에는 대통령에 대한 역대 대법원장들의 태도가 조 대법원장과는 달랐다는 점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9월 청와대에서 퇴임하는 최종영 전 대법원장에게 서훈을 수여하고 있다. ⓒ노무현 재단
대법원장과 대통령의 대법관 인선 갈등의 대표적 사례로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과 최종영 대법원장의 '이견'이 꼽힌다.
당시 최종영 대법원장은 서성 대법관의 후임으로 김용담 광주 고등법원장을 제청했으나 노 전 대통령은 정권 출범 직후부터 사법부의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인사 구조와 대법원 구성의 다양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임명에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결국 노 전 대통령과 최 대법원장은 합의를 이뤄냈는데 대법관 후보로 김용담 광주 고등법원장을 제청을 받아들이는 대신 사법부는 정부의 사법개혁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약속을 내놨다. 두 사람은 2023년 8월22일 청와대에서 만나 대법원의 기능과 구성, 법관 인사제도, 법조인 선발·양성제도 및 사법개혁기구 구성 등을 논의했다.
대법원장이 대통령의 요구인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에 대한 '존중'을 보여줬고, 대통령도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존중해주는 모양새를 갖춤으로써 양쪽의 갈등을 풀어낸 셈이다.
조 대법원장을 임명한 윤석열 전 대통령은 대법관 인선을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윤석열 정부 대통령실은 2023년 당시 김명수 대법원장이 조재연·박정화 대법관 후임 인선 절차를 진행하자 특정 정치 성향의 인물이 포함된다면 임명을 거부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밝혔다.
대법원장이 대법관후보자 추천위원회로부터 최종 후보를 추천받기도 전에 대통령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법관 후보가 아니라면 결코 임명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결국 김 대법원장은 법조계에서 상대적으로 정치적 색채가 뚜렷하지 않은 '무난한 카드'라는 평가를 받는 권영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서경환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윤 전 대통령에게 제청했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김 대법원장이 대통령실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고 대법관 공백을 막기 위해 접점을 찾은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조 대법원장이 청와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손봉기 대법관 후보자를 서면으로 제청한 지금의 행태와 달랐다.
조 대법원장은 전날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대통령과 (대법관 제청을) 사전 협의할 헌법상 의무도 없고 국회와 대통령이 대법원장의 제청에 관여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역대 대법원장들이 대통령과 대법관 인선을 논의한 것은 '자발적'이고 '선의'였을 뿐 법적 의무는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역대 대법관 인선 갈등을 살펴보면 '대통령은 결국 대법원장의 말을 들어왔다'는 조 대법원장의 주장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존중하는 만큼 대법원장도 대통령과 국회의 헌법상 권한을 존중하고 서로 한발씩 물러났기 때문에 갈등을 풀 수 있었다.
"역대 대통령이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존중했다"는 말을 하려면,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존중만큼 대법원장도 대통령과 국회의 헌법상 권한과 국민의 사법개혁 요구를 존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는 이유다 .
임재성 변호사는 이날 MBC라디오 시선집중에서 "헌법에 사전 협의할 의무가 없으니 나는 사전 협의 안 해도 된다고 그러면 계속 대법원장은 제청하고, 대통령은 임명 거부하고, 왔다갔다 하면 결국 대법원이 구성되겠나"며 "헌법이 작동하는 중요한 관행과 절차의 실행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전제들을 다 깡그리 무시하시는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임 변호사는 이어 "대통령은 임명권 행사를 안 하는 방식으로 (대법원장의 제청을) 제어하거나 비판할 수 있고, 국회는 국회대로 제청권 행사가 과연 기존의 절차를 유지했는지, 헌법기관 사이의 충돌 원인이 무엇인지를 국정감사 기간에 물을 수 있는 건데 국회도, 대통령도 관여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면 출구가 없다"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