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이 좌파정당의 지원으로 사상 처음 주의회 의장을 배출하면서 독일 정치의 오랜 금기인 '방화벽'에 큰 균열이 생겼다.
AfD가 이처럼 다른 정당의 협조를 받아 제도권 핵심 직책에 진입한 가운데,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이끄는 독일 연방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 등 '러시아 봉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넘어 다른 유럽 국가까지 침략할 것으로 판단한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국내 정치보다 '러시아 봉쇄'가 더 급하다는 것이다.
울리히 지크문트 AfD 작센안할트주 총리후보. ⓒ 로이터=연합뉴스
AfD가 작센안할트주 의회 의장직을 확보했지만 주정부를 이끌기 위한 총리직 확보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로이터가 6일(현지시각) 전했다.
AfD, 좌파 쪽 지원으로 주의회 의장직 확보
AfD는 지난 9월 주선거에서 작센안할트주 의회 83석 가운데 39석을 얻어 제1당이 됐지만 과반인 42석에는 3석이 부족했다.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지만 다른 정당의 협조 없이는 주정부 구성은 물론 주의회 주요 직책 확보도 어려운 구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 포퓰리스트 성향의 자라 바겐크네히트 동맹(BSW)이 최대 교섭단체가 의장을 맡는 의회 관례를 근거로 AfD의 토비아스 라우슈 주의회 의장 후보를 지지했다.
라우슈는 찬성 48표, 반대 29표, 기권 5표로 당선됐다. AfD 의석수보다 9표 많은 찬성표를 확보한 것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AfD 39석과 BSW 5석을 합쳐도 44석에 그치기 때문에 라우슈는 최소 4명의 추가 의원으로부터 찬성표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비밀투표인 만큼 이들 추가 찬성표가 어느 정당에서 나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주의회 의장은 주정부를 이끄는 주총리보다는 권력이 약하지만 주의회를 대표하는 직책인 만큼, AfD 정치인이 처음 이 자리에 오른 것 자체가 영향력 확대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영국 가디언은 라우슈의 주의회 의장 선출을 두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극우 정치인이 주의회 의장에 오른 첫 사례라고 평가했다.
특히 작센안할트주 AfD는 주 헌법보호청에 의해 우익 극단주의 조직으로 분류돼 있어 이번 선출은 단순한 의회 인사를 넘어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의장직 확보 넘어 '방화벽' 폐기 주장
토비아스 라우슈 독일 작센안할트 주의회 의장. ⓒ 로이터=연합뉴스
라우슈는 당선 뒤 모든 정당에 같은 규칙을 적용하겠다고 밝히면서도 "정치적 방화벽의 시대는 지나간 과거의 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방화벽'은 주류 정당들이 AfD와 연정이나 정치적 협력을 하지 않는 원칙을 일컫는다. 이번 선출에서 BSW가 AfD 후보를 지지하면서 이 원칙이 실제 의회 운영 과정에서 어디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 주목된다.
BSW는 최대 교섭단체가 의장직을 맡는 의회 관례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이번 선출은 단순한 극우 정당의 의장직 확보를 넘어 다른 정당들이 AfD와 협력하지 않는다는 방화벽 원칙이 흔들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다만 이번 결과만으로 정치적 방화벽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BSW는 AfD와의 연정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으며 주정부 수장인 총리를 뽑는 일에도 AfD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울리히 지크문트 AfD 대표는 오는 12월 주총리 선출에 도전할 계획이다. 주총리 선출에서 AfD가 다른 정당의 협조를 얻을 수 있을지가 이번 의장 선출에 이은 다음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메르츠 총리 우크라 방문해 지원 약속, AfD는 '전쟁 반대'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왼쪽)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 EPA=연합뉴스
이런 가운데 독일 연방정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등 러시아 봉쇄에 매진하고 있다. 메르츠 총리는 10월4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전격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만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재확인했다.
메르츠 총리는 이번 키이우 방문에서 10억 유로(한화 약 1조5천억 원) 규모의 추가 군사 지원과 3억5천만 유로(약 5200억 원) 규모의 에너지 인프라 복구 지원 계획까지 내놨다. 메르츠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를 향한 공격을 막지 못하면 러시아가 결국 유럽을 위협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내놨다.
메르츠 총리의 이런 대러시아 강경노선에는 독일 외교·안보 당국의 러시아 위협 인식(러시아포비아)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일각에서 나온다. 요한 바데풀 독일 외무장관도 러시아가 유럽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위협과 사보타주, 정보전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독일 내부에서는 우크라이나 지원과 대러시아 정책을 둘러싼 회의론도 커지고 있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치벨레(DW)는 동부 독일에서 연방정부의 우크라이나 정책이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치학자 요하네스 바르비크 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는 DW에 "더 많은 무기를 제공하기보다 외교에 집중해야 한다는 요구가 반드시 친러시아 성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실제로 ARD-도이칠란트트렌드의 여론조사에서는 독일 국민 가운데 러시아의 위협을 심각하게 느끼는 비율과 함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이 지나치다고 보는 비율도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동부 지역과 AfD 지지층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위협 인식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미국 싱크탱크 카네기국제평화재단도 최근 분석에서 "AfD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재정 지원 축소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주장하면서 독일과 유럽의 러시아 정책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짚었다.
실제 메르츠 정부가 러시아의 위협과 유럽 안보를 강조하며 우크라이나 지원을 이어가는 가운데, AfD는 전쟁 개입에 반대하고 대러 관계 개선을 주장하며 세력을 넓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