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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4월 14일 13시 35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7월 16일 14시 02분 KST

베이비박스, 여성과 아동의 인정투쟁

화장실, 심지어 쓰레기더미에 자신이 출산한 영아를 버리고 도망간 비정한 또는 철없는 엄마의 기사가 언론을 장식한다. 이런 엄마들의 사정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 서울 어느 지역에 영아유기시설인 베이비박스가 설치되었고, 여기에 최근 몇 년 사이 수백 건의 영아유기가 집중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영아유기는 현행법에 따라 처벌되는 범죄인데 베이비박스는 범죄를 조장하는 나쁜 시설인가, 아동의 생명을 구하는 좋은 시설인가?

한겨레

화장실, 심지어 쓰레기더미에 자신이 출산한 영아를 버리고 도망간 비정한 또는 철없는 엄마의 기사가 언론을 장식한다. 이런 엄마들의 사정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 서울 어느 지역에 영아유기시설인 베이비박스가 설치되었고, 여기에 최근 몇 년 사이 수백 건의 영아유기가 집중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영아유기는 현행법에 따라 처벌되는 범죄인데 베이비박스는 범죄를 조장하는 나쁜 시설인가, 아동의 생명을 구하는 좋은 시설인가?

베이비박스의 역사는 길다. 어떤 학자는 중세 유럽에서 교회에 아이를 버리고 종을 울리면 버려진 아이를 교회가 돌보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베이비박스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불가피하게 영아를 버릴 수밖에 없다면 안전한 시설에 버리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논리다. 자신이 출산한 영아를 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양하다. 미혼모라거나 결혼할 수 없는 관계에서 출산하였다거나 출산한 자녀를 양육할만한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는 등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동일하게 중요한 것은 버려진 아이의 건강과 생명이다. 비록 버려졌지만 유기된 영아는 안전하고 위생적인 시설에 유기되는 경우에 건강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준비된 시설에 유기되어 다행히도 건강과 생명을 건진 아동이 평생 부담해야 하는 짐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신원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동은 그 부모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익명출산(anonymous birth)에 해당한다.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익명출산은 원하지 않게 임신한 여성이 낙태하지 않고 출산할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하되 출산한 여성의 신원을 영원히 비밀로 보장해주는 제도다. 익명출산으로 태어난 아동은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동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신원을 알 수 없게 된다. 베이비박스를 포함한 익명출산은 이러한 방식으로 출생한 아동이 부모의 신원을 알 수 없게 됨으로써 '뿌리(출생기원)를 알 권리(right to know his/her origin)'를 침해당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임신과 출산 및 양육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보장받아야 하기 때문에 낙태, 유기, 입양을 포함하는 모든 모성의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한국처럼 경제적·사회적 사유로 인한 낙태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불법낙태를 감행하지 않으면서 자기결정권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유기가 허용될 필요도 있다. 여성주의 진영에서 영아유기의 합법화를 낙태권의 확장으로 이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베이비박스의 문제는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는 엄마와 버려진 아이 사이에 벌어지는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 다시 말해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이 그토록 강조하는, 아동의 복리에 최선이 되는 길(the best interest of the child)은 친모에 의한 양육이다. 국가는 출생한 아동을 친모가 직접 양육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할 책임이 있다. 키울 능력도 없는데 낳기만 하라고 하고, 낳았으니 양육하라고만 하면 이보다 더 무책임한 요구는 없다. 게다가 국가가 아무리 지원을 잘해도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양육의 포기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존재한다. 법적으로 입양이 허용되어 양육의 포기가 인정되는 까닭이 이것이다. 최근에 아동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미성년자 입양에서 가정법원의 허가를 필수화하고, 가정법원에 제출해야 하는 출생신고서에 부모의 인적 사항 기재를 의무화하였다. 혹자는 이러한 조치가 베이비박스에 버려지는 아동의 숫자를 증가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동안 부모의 신원을 감춘 채 입양기관에 맡기던 관행과 베이비박스에 버리는 행위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반문해 볼 수 있다. 결국 입양허가제에 따라 아이를 입양시키면 신원이 드러나고, 불법적으로 베이비박스에 유기하면 신원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 차라리 익명출산을 제도화하고, 친모의 신원을 국가가 관리하는 대안을 고려해볼 수 있다. 친자가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친모의 신원을 꼭 알아야 하는 불가피한 사정이 발생하는 경우에만, 오로지 친자 본인에 대해서만 친모의 신원을 공개하되 친모의 동의를 얻게 하는 방식이다.

베이비박스에 영아를 유기한 친모의 비정함을 탓하기 전에 천륜(天倫)이라고도 부르는 모정을 끊으면서까지 자신의 자녀를 유기할 수밖에 없는 친모의 딱한 사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의 기구한 운명을 동정하지만 말고 이 아이의 건강과 생명을 구하면서 친부모의 신원을 알 수 있게 하는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낙태를 법적으로 금지하였으면 익명출산이라도 허용해주든지 베이비박스를 합법화하여 궁지에 처한 여성에게 탈출구를 제공해 주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베이비박스에 버려지는 아이들을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그들의 친모가 직접 양육할 수 있도록 국가공동체 전체가 지원하든지 의료시설이나 사회복지시설을 지정해서 유기된 영아들의 건강과 생명이 보호될 수 있도록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최선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