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8년 01월 15일 10시 35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15일 10시 38분 KST

"옷질에서 재미를 찾자니, 외롭네요."

the

[박사논문 엎고 스타일링 도와드려요①]

01 "옷질에서 재미를 찾자니, 외롭네요."

안녕하세요. 주변에 신뢰할만한 패션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없어 항상 고민이던 부분이 있었는데, 학교게시판에 올리신 글을 보고 지원하게 됐습니다. 현재 27살 남자대학원생으로 아침에 운동을 하고 연구실에서 주로 시간을 보냅니다. 좋아하는 것은 포멀한 스타일입니다. 키는 170cm, 운동을 좀 했다고 보이는 체형이고 피부톤은 어두운 갈색. 속칭 동남아 피부색입니다. 포멀한 스타일을 추구했지만 노안에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항상 본래 나이보다 늙어 보인다는 얘기에 어느 순간부터 스트레스+지금 나이에서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최근 스타일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울리는 색과 어울리는 눈썹 모양에 확신을 못 갖고 있습니다. 도와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내 블로그에 남겨진 ◎◎군의 사연을 읽다, '속칭 동남아 피부색'이란 표현에서 폭소가 터져버렸다. 진정하는데 몇 분이 지나고서야 그에게 도와주겠다는 답글을 남길 수 있었다. ◎◎군은 며칠 후 자신의 연락처와 함께 고맙다는 답글을 남겼다.  

그의 첫 인상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를 만나기 전 있었던 일을 소개하면 이렇다. 그를 만나기 전 나는 스마트폰으로 ◎◎군의 연락처를 복사해서 내 연락처에 저장을 하려다 실수로 전화를 걸었던 적이 있다. 황급히 전화를 끊었으나, 곧바로 번호의 주인인 ◎◎군으로부터 전화가 오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묻는다.

"좀 전에 전화하셨던데, 누구세요?" 

뭔가 철벽 방어를 당한 느낌이다. "실례지만 어디시죠?"도 아니고 "누구세요?"라니.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내 정체를 밝혔건만, 그의 목소리는 끝까지 경계태세 해제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경계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와 약속한 날이 다가오자 나는 그에게 '나만의 곡'을 골라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간결한 답이 돌아온다. "Bill Evans의 Autumn Leaves입니다." 곡을 찾아서 들어보니 재즈였는데, 곡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베이스 기타의 애드리브가 인상적이었다. 애드리브가 제대로인 곡을 고른 걸 보니 ◎◎군은 재즈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 같다. 

며칠 후 그를 만났다. 약속 장소인 카페에 미리 와서 랩탑으로 분주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알아보고 다가갔다. 그런데 며칠 전 수화기 속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그는 서글서글한 미소의 남자가 나를 반겼다.

그를 만나기 전 빡빡한 일정에 녹초가 된 나를 향해 괜찮겠냐고 물어보는 모습이 상냥하고 친절했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멋졌다.

그와 마주함과 동시에 겉모습을 빠르게 스캔했다. 다른 신청자들이 다소 에지가 부족한 모습이었다면, ◎◎군은 멋을 아는 청년이었다. 트렌디한 동그란 안경, 버건디 셔츠, 밑창이 흰 색으로 마감된 브로그 살짝 들어간 블랙 윙팁 슈즈. 나쁘지 않다. 그에게 내 도움은 별로 필요 없어 보였다. 

그런 그의 얘길 들어봤다. 평소에 그는 패션에 관심이 많아 패션이나 스타일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고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그런데 예전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확고히 정해져 있었지만 그 스타일로 좋은 평가를 받은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지인들이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고민이라고 털어 놓는다.

패션 전문 서적에서 본 정답 같은 스타일로 입어도 왠지 모르게 자신이 입으면 과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억울하고 속상하다고 밝힌다. 그날의 룩도 실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입은 것이 아니라 만족스럽지는 않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더니 내 앞에 서 보이며 자신의 신발을 보란다. 원래는 앞코가 긴 정통 신사화를 좋아했는데 사람들이 과하다는 말을 해서 얼마 신지도 못하고 모셔놓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날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너무 무난한' 신발을 신어서 불만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내 눈에 그 신발은 결코 '너무 무난한' 것이 아니었다. 밀푀유 같은 흰 밑창에서는 겹겹이 파란색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 덕에 전반적으로 그 신발은 적당히 튀었다.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들어왔다는 '노안'이라는 평가는 얼굴형이 길어서일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긴 얼굴에 (그가 사랑하는) 긴 신발이 만나면, 과해 보일 수 있다. 한편 내 눈에 그가 신은 신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 말을 하니, ◎◎군은 그제야 신발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내 놓는다. 그는 그 신발이 자기다운 것이 아니라서 싫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남들 보기에'라는 말을 거의 입에 달다시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신발도 누군가가 추천을 해준 것인데, '남들 보기에' 튀지 않고 괜찮을 것 같아 마지못해 신은 눈치다. 

입고 온 버건디 셔츠가 예쁘다고 감탄했더니 셔츠에도 사연이 많다. 셔츠를 바지에 넣지 않고 입으니 너무 땅딸막해 보이더란다. 그래서 셔츠를 바지에 넣어 입었더니 또 다리 길이는 키에 비해 긴 편이라 바지와 셔츠의 비율이 주위 사람들의 눈에는 부담스러웠나 보다. 그래서 그의 그 셔츠는 바지에서 내어 입기 위해 맞춤 셔츠 집에서 짧게 맞춘 거라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의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가운데의 금속 장식이 투박하지만 뭔가 에지가 있는 멋스러운 갈색 서류 가방. 파슬(Fossil) 제품이었다. 

내가 쇼핑 중 쇼윈도에서 파슬의 남자 가방을 볼 때마다, 크기만 작으면 갖고 싶다고 느끼는 제품이 한두 개는 꼭 있었다. 난 그의 가방을 반갑게 살펴봤다. 그는 평소 그 가방이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게 자신의 가방이 예쁘다는 칭찬을 듣는다고 말하며 살짝 상기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옷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느낀 점이 있었다. 그는 패션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다. 다양한 전문 용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훨씬 더 지식수준이 높았다. 어디 가면 뭘 팔고, 어느 브랜드가 품질이 좋은지에 대한 쇼핑 정보도 수준급이다. 

그의 '나만의 곡' 얘길 꺼냈다. 곡에서 베이스의 애드리브가 인상적이라고 말하자, 그는 그것이야말로 재즈라고 말한다. 그의 말이 맞다. 애드리브는 재즈 자체의 묘미이다. 대중적인 곡을 좋아하는 평균적인 한국 사람이라면 애드리브를 듣고 이게 뭐냐고 불만을 표출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의 일상이 궁금해졌다. 그에게는 억누르고 있는 불꽃이 있어 보였다. 패션에 대한 관심도 일종의 불꽃일 것이고. 대학원 생활의 무미건조함은 나도 충분히 알고 있는 상태라, 그런 답답함을 잠시나마 해소시켜줄 그의 불꽃들이 어떤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옷에서도 그런 불꽃을 피울 수가 있도록 내가 도와야 하고.

그런데 의외의 대답을 한다. 대학원에서 하는 공부가 재미없는 것은 아니란다. 공부는 재미있고, 대학원에서 자신의 개성이 어느 정도 존중받고 있어서 특별히 불만은 없다.

그런데 그에겐 공부 이외에 다른 재미(fun)들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운을 떼며 말했다. 대학원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비밀이 있다나. 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살사댄스 동호회에서 꽤 오래 활동을 했다는 말을 한다. 아니 그게 무슨 비밀이냐고 반문했더니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는 '춤추는 사람'에 대한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은 점을 들었다. 그는 역시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컨설팅은 어떻게 신청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학교 게시판에서 '박사 논문 엎고 스타일링 도와드려요'라는 내 글을 읽고 어떤 점이 본인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질문했다. 

일단 '박사 논문 엎고'라는 제목 때문에 '어느 분이 이렇게 용기 있는 결정을?'이라는 생각으로 클릭 했는데, '이분은 얼마나 옷 입는 것을 좋아하면?'라는 궁금증이 들었단다. 

그리고 평소 (특히 남자인 자신이) 옷 얘기를 타인과 솔직하게 나눌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도 들었다. 옷 얘길 나누다 보면 타인과 의견이 엇갈리게 되고, 잘못하다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에게 옷이라는 화젯거리는 늘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군이 컨설팅 신청을 했던 이유는 내 자신감이었다. 타인을 위한 컨설팅을 하겠다고 나설 정도면 대단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고, 그 자신감을 믿어 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와 가까운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의 얼굴이 그리 노안은 아니다. 특히 그는 피부가 좋았다. 그러자 내 칭찬을 받아들이는 말을 하는 대신 이런 말을 한다.

"노안인데 피부 관리라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런이런. ◎◎군의 진짜 문제는 노안이 아니라 낮아져 있는 자존감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열정적인 사람(에니어그램 7번)'임을 직감했다. 그는 좀 더 재미있고 유쾌한 사람인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자신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나에게 컨설팅을 부탁하기로 한 결정도 내 자신감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헤어질 무렵 난 그날 그와 이야기하며 받은 인상을 짧게 정리해 주었다.

"◎◎군은 지금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면이 있지만 남에게 맞추는 사람으로 변한 건 아니라고 보았어요. 태생적으로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자신의 방을 자기 방식대로 꾸며놓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기고 싶은데, 사람들 초대했더니 다 싫다고 나가버려서 너무 외로운 거예요." 

"훅 들어오시네요. 근데...... 맞아요! 맞아요. 외로운 거예요."

나는 매사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그에게 조금 가혹하지만 한시적으로 쇼핑 금지령을 내렸다. 앞으로 내가 쇼핑해도 좋다고 할 때까지는 아무 것도 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는 힘들겠지만 참아 보겠단다. 

그에게도 다른 신청자들과 마찬가지로 다음 시간까지 해올 숙제를 내줬다. 자신의 별칭을 찾을 것, 버킷리스트 10가지를 써올 것, 패션 앱에서 '왠지 끌리는 룩'을 캡쳐해 올 것.

02 Fun5 Face × Fun Fashion = Too much

다시 만난 ◎◎군. 옷차림이 차분해졌다. 심지어 그의 옆모습을 보고도 난 '닮은 사람이네'라고 못 알아보고 지나쳤었다. 그날의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첫 날 내 얘길 듣고 자신의 옷에서 힘을 좀 빼고 왔다고 말한다.

나는 그의 별칭과 버킷리스트가 너무너무 궁금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군이 재미있는 사람이니까. 그는 그 동안 자신에 대해서 탐구를 하며 떠오르는 하나의 단어가 있었단다. 

'얌체'

나는 박장대소했다. 솔직하게 스스로를 인정하는 딱 맞는 옷 같은 별칭이라. 그가 말한다.

"아무리 봐도 전 그냥 '얌체'예요."

그리고 그는 '얌체' 앞의 수식어를 생각했다며 말을 이어 나가다 자꾸 주저한다. 나는 그에게 대체 수식어가 뭐냐고 물었다.

"'젠틀한'이에요."

그러자 난 가벼운 한숨이 나와버렸다.

"뭘 그리 망설여요? 내가 보기에 ◎◎군은 충분히 젠틀하니 '젠틀한'이라는 수식어 써도 돼요!"

그는 멋쩍게 웃는다.

"아 그래요?"

그는 그렇게 자신의 별칭을 '젠틀한 얌체'로 확정했다.

그의 버킷 리스트를 살펴보았다. 10개가 다 재미나다. 하고 싶은 것 중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들은 웬만하면 다 하고 살기 때문에 리스트에 있는 것들이 다소 비현실적이라는 설명을 한다. 그런 설명에 내가 부러워 하니 역시나 얌체답게 받아친다.

"하고 싶은 걸 지금 하고 계시면서."

나는 그에게 10개 중 가장 하고 싶은 것 하나만 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둘 중에 선택을 못하겠다며 고민이란다. 경합을 벌이는 두 가지는 이렇다. '범죄로 크게 한탕해서 일확천금을 얻기'와 '원나잇 상대를 유혹하기'. 너무 욕망에 충실한 것들이라며 본인은 살짝 민망해했지만 나는 그저 재밌기만 했다.

영화 <범죄의 재구성>이 생각났다. 영화처럼 둘 다 하지 그러냐고 말했더니 돈으로 이성을 유혹하는 건 재미가 없단다. 자기 매력으로 이성을 꼬시는 게 아니니까. '얌체'군의 재치 있는 대답을 곱씹어보니 그가 아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아니다. 자기 매력으로 이성을 만날 자신이 있다는 거니. 아니, 어쩌면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혹을 이용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는 그의 '왠지 끌리는 룩'을 보기로 했다. 토털룩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내게 하는 말.

"별로 안 튀지 않나요?"

자신의 취향이 튀지 않음을 나에게 확인받고 싶은 거다. 그래서 봤다. 안 튀는지. 하나같이 왼쪽 주머니에 행커치프를 넣고 있었다. 첫 번째, 체크무늬 바지 룩. 체크 바지 하나만으로도 튄다. 두 번째, 수트에 베스트까지 다 갖춰서 입은 룩. 

안 튀긴. 특히 넥타이를 살짝 빼 볼륨 줘서 입는 걸 좋아한다는 '얌체'군의 설명이 붙이니 얼굴이 긴 편인 '얌체'군에게는 그 룩이 과할 수도 있겠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룩. 둘 다 셔츠와 타이의 색상 매치가 꽤나 강렬하다. 이걸 만약 '얌체'군이 입었을 경우 그의 얼굴과 함께 어우러진 토털룩을 생각하니 너무 튈 것 같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얌체' 군에게 말했다. 

"'반대의 법칙'에 대한 글 내 블로그에서 읽었죠? 얼굴 분위기와 같은 분위기의 옷을 입으면 룩이 촌스럽거나 과해 보일 수 있어요. '얌체' 군은 Fun(재미)을 중시하는 사람이죠? 지금 가져온 '왠지 끌리는 룩'이 모두 Fun이라는 맥락에서 보여요. 그런데 재밌는 게 뭐냐면 '얌체' 군 얼굴에 이미 Fun이라는 게 쓰여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이 얼굴에 옷까지 Fun하면 이 얼굴은 그냥 Fun이 아니라 Fun∙Fun∙Fun∙Fun∙Fun! 그러니까 얼굴=Fun5[펀오승]으로 보이게 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말을 들으며 꽤나 심각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역시 유쾌하다. 내가 말할 때 "Fun5"[펀오승]을 익살스런 표정으로 따라했다.

'반대의 법칙'에 이어서 '여백미의 법칙'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옷이라는 걸 소통의 맥락에서 접근하자는 것이 내 패션 법칙 중 하나인 '여백미의 법칙'이다. 우리는 옷을 입을 때 타인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 입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소통을 위해서 입는다. 그는 소통의 맥락에서 옷을 입는다는 나의 전제에 동의했다. 

나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상대방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나와 소통을 나누는 데, 면대 면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에너지 고갈을 유발시킨다. 그런데 만약 '얌체' 군이 가져온 '왠지 끌리는 룩'과 같이 화려한 셔츠와 타이의 보색대비가 '얌체' 군 얼굴 주위에서 '나를 좀 봐줘'라며 어른거린다면, 상대방은 그와 얘기하는 동안 피로감을 배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리고 한 가지 이야기를 보탰다. 그는 젠틀하지만, 때때로 공격적일 때가 있다. 처음에 내가 실수로 전화 걸었을 때 그의 반응이 그랬다. 그리고 그는 내가 무언가 설명할 때마다 부분적으로 꼬투리를 잡아서 반문 하며 내 말을 가로막을 때가 종종 있었다. '얌체'군도 자신에게 공격적인 면이 있음을 시인했다. 종종 들어온 말이란다.

그렇다면, 더더욱 '얌체'군에게는 상대방에게 뭔가 '얌체'군과 이야기할 때 쉴 수 있는 휴식의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얌체'군에게 얼굴 주변의 V존은 깔끔하게 하얀 여백으로 남겨두자고 설득했다. 

'빼기와 더하기의 법칙'도 이야기했다. 옷에서 재미를 추구하고 싶다면, '얌체'군의 경우는 특히나 더 넥타이가 아니라 양말이나 장갑 그리고 신발같이 얼굴에서 먼 곳에, 언제든 제거 가능한 아이템으로 재미의 요소를 더하는 것이 좋다.  그의 얼굴은 이미 '펀 오승'이기 때문에 아무리 옷을 (평균적으로는) 지루하게 입는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눈에는 절대로 '얌체'군이 지루한 사람으로 보일 리는 없다. 나는 확신을 갖고 얘기했다. 

아마도 그가 패션 전문 서적에서 본 대로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과하다고 느낀 것은 그의 얼굴이 주는 효과 때문이었을 거라고 말했다. 거의 아무런 반박 없이 내 말을 곰곰이 새겨듣는 눈치다.

그러나 그는 고집이 있었다. 아이보리 혹은 화이트 색상을 자기 얼굴 근처에 착용해본 적이 거의 없단다. 자기가 (패션 전문 서적에서 배운 바로는) 자신과 같은 웜톤 피부엔 그런 색상이 어울리지 않을 것이며, 그런 색상은 자신이 가진 옷과도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얌체' 군이 입고 온 스웨이드 재질의 바이커 재킷을 잠깐 빌리겠다고 했다. 색상이 특이하다고 말하자 녹색을 좋아한다며 다크 그린과 블랙의 중간 정도 되는 색상이 맘에 들어 꽤 비싼 돈을 주고 올세인츠(Allsaints)에서 구입했다고 말한다. 가만히 보니 지퍼 디테일이 꽤 있었다.

나는 내가 입은 아이보리 스웨터 위에 그의 바이커 재킷을 걸쳐 입어봤다. 어차피 사이즈는 안 맞으니 핏은 차치하고 색상 매치만 보라고 했다. 

"생각보다 괜찮네요."

내가 입어본 걸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아이보리 이너가 주는 효과를 조금은 알겠나보다. 아이보리 이너를 입었기 때문에 바이커 재킷의 디테일도 다소 절제된다는 점을 그도 보게 된 것 같다.

두 시간 내내 그와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나서 피부톤에 대해 한 마디를 남겼다.

"'얌체' 군 피부톤은 웜톤으로 보기엔 그리 노랗지 않아요. 그렇다고 쿨톤도 아니지만."

03 '포멀한 갑옷' 내려놓기

세 번째 만남의 날이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얼굴과 먼 곳에 소품으로 디테일을 더하라는 얘길 지난 시간에 해줬다. 예컨대 노란색 스카프보다는 노란색 양말이나 드라이빙 글로브 정도면 좋겠다고. 그랬더니 눈을 반짝이며 노란색 드라이빙 글로브를 꼭 사고야 말겠다고 말했었다. 

우연의 일치로 나는 두 번째 만남 며칠 후 자라에서 (노란색은 아니었지만) 가죽 재질의 밝은 갈색 드라이빙 글로브를 발견했다. 나는 '얌체'군이 장갑에 욕심을 내던 모습이 떠올라 그에게 제품 링크를 보냈다. 

"장갑 주문했어요."

세 번째 날이 그는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내게 말했다. 그렇게 빠르게 구입할 줄이야. 쇼핑을 참으라는 내 얘기를 듣고 다소 억눌렸었는지 그는 그렇게라도 재미를 추구하고 싶었나보다. 평소에 패션 소품으로서 드라이빙 글로브를 좋아했었단다.

자리에 앉고 보니 그날 얌체군의 스타일이 멋졌다. 역시나 처음부터 패션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인지, 내게 배운 법칙들을 금방 알아듣고, 잘 적용하여 절제된 스타일리시함을 입고 나타났다. 생지 데님, 화이트 스니커즈, 헤링본 패턴 회색 양말, 화이트 티셔츠 매치한 다크 그레이 스웨터, 그리고 황갈색 싱글 버튼의 트렌치코트. 

특히 그가 메고 온 다크 브라운 메신저백이 너무 예뻤다. 내가 탐을 냈더니, 이탈리아 여행 중에 장인이 운영하는 '보욜라(Bojola)'라는 브랜드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거란다. 참, 갈색 가죽 스트랩의 클래식한 시계도 차고 왔었다.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스타일링이었다. 멋쟁이의 가능성과 자질이 꽤나 있는 친구다.

그의 스타일링이 흠잡을 데 없다며 칭찬을 해줬더니 지난번 내가 트레이닝 중에 생지 데님 한번 입어보라고 해서 유니끌로에 가서 바로 구입했다고 밝힌다. 그런데 청바지 핏이 너무 타이트해서 늘리려고 집에서도 입고 있는 중이라나. 

그러면 그냥 한 사이즈 큰 것이나 통이 조금 여유 있는 것으로 구입하지 그랬냐고 물었더니 통이 넓어지는 순간 아저씨가 되어서 싫단다.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을 누구나 싫어하긴 하지만, '얌체' 군은 특히나 더 민감하다.

나에게 질문이 하나 있다며 사진을 내민다. 마치 복습을 하려고 문제집을 풀다 막혀 선생님께 질문하는 학생 같다. 지난 시간 나에게 '반대의 법칙'을 배우고 나서 이런 저런 사진들을 보며 그 법칙을 적용하여 분석을 해봤나보다. 

그가 내민 사진은 피겨여왕 김연아의 어느 공식 석상 룩이었다. 구두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내게 배운 법칙에는 어긋나는데 자기 눈에는 그리 나빠 보이지가 않더란다. 이유를 물어본다. 사진을 보니 그가 궁금할 법 했다. 이유는 피겨여왕의 눈매였다. 그녀의 가로로 긴 눈매가 옷과 신발, 메이크업의 과함을 절제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패션모델의 얼굴과 연예인의 얼굴은 다르다는 얘기도 해줬다. 패션모델은 어떤 옷이나 소화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너무 여성스런 얼굴로는 모델 일을 하기 힘들다.  덧붙여서 내가 해준 얘기. 아마 본인의 얼굴도 '펀 오승'이기 때문에 옷이 아무리 지루해도 절대 남들이 보기엔 지루할 수가 없을 거라는 것.

그런데 왜 그리 포멀한 룩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물어봤다. 어찌 보면 그의 '왠지 끌리는 룩' 중 베스트(vest)까지 매치한 수트 룩은 너무 드레스 업한 느낌인데 그런 룩에서 넥타이까지 볼륨을 주면 무슨 갑옷 같아 보일 것 같다. 

그는 내 얘길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제 얼굴이 좀 코믹한 면이 있잖아요. 그래서 '남들 보기'에 우스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랬던 게 아닐까 하네요. 너무 흐트러진 사람처럼 보이긴 싫으니까."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뭔가가 충돌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저씨처럼 보이는 건 싫어하는데 수트를 좋아한다. 수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스워 보이기 싫어서이다. 그런데 지루하고 재미없는 옷차림은 싫어한다. 그래서 수트를 재미있게 입기 위해서 넥타이와 셔츠 조합을 화려한 룩과, 바지에 무늬가 들어간 룩에 끌렸구나!

그리고 나는 패션에 대한 그의 관점을 접하며 뭔가 포착한 점이 있다. 그는 패션 전문 서적에서 배운 내용과 가치를 거의 공식처럼 따르려고 했다. 아마도 수트를 좋아하는 건 우스워 보이기 싫어서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신사복을 다룬 남자 패션 전문가들의 이론화된 지식을 바이블로 따르려고 하다 보니 생긴 취향이기도 하겠다.  

'얌체' 군은 대화 도중 나에게 세밀한 부분에 대해서 자주 질문을 하던 친구이다. 본인의 눈과 직관보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지식에 충실히 따르려는 경향이 있었다. 아마도 그건 얌체군이 '젠틀한 얌체'라고 본인을 칭한 것처럼 '열정적인 사람'이면서도 '충성스런 자'(6번 날개)의 면을 부차적으로 가진 사람이기 때문인 듯 하다.

그에게 수트는 어쩌면 자신이 우스운 사람은 아님을 드러내면서도 뭔가 재미있게 그리고 (책에서 본 대로) 패셔너블하면서 아저씨처럼은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는 옷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옷을 입을 때 생각해야 하는 타인과의 소통이라는 대전제로부터 다소 멀어진 인상이다. 수트는 그러니까 일종의 '포멀한 갑옷'인 셈이다.    

'젠틀한 얌체' 군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지 가닥이 잡혔다. 

첫째, 재미있지만, 과하지 않은 룩을 제시하는 것. 

그가 '젠틀하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재미를 중시하는 '얌체'이다. 그에게는 갑옷 같은 수트 말고도 우스워보이지는 않으면서, 재미있고, 소통 욕구는 상승시키는, 아저씨 같아 보이지 않는 룩이 필요했다. 

사실 내가 이 과제를 명확히 인식하기 전까지는 내가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어 보였다. 그의 아이템 하나하나가 신경 써서 구입한 품질 좋기로 유명한 브랜드의 것들이라. 그러자 그가 하는 말. '빼기의 법칙'이 적용된 가장 기본이 되는 아이템들이 자신에게는 부족하단다.  

쇼핑 리스트를 써 내려갔다. 화이트 크루넥 티셔츠, 차분한 색상의 니트 스웨터, 검정 슬랙스. 그리고 현재 그의 '펀 오승' 얼굴 분위기를 절제시키는 안경. 그 외에 내가 꼭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 있었다. 아이보리 머플러. 

하루는 '얌체' 군이 내게 검정색 캐시미어 스톨을 발견했다며 목에 두르고 찍은 사진을 SNS로 보내왔다. '펀 오승'인 그의 얼굴은 여백을 필요로 하는데 아무리 캐시미어라도 검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렸다. 잠시 후 검정 대신 아이보리 머플러가 좋겠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다. 그러면 겨울에 보온도 해결되면서 '얌체' 군 얼굴 주변에 여백을 줄 수 있겠구나. 

마지막으로 그에게 앞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멋진 밀리터리 패딩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슬랙스와 스웨터를 입은 후 코트를 입는 것보다는 차분한 디자인의 패딩을 입으면 '반대의 법칙'이 적용되어 지루하지도 않으면서 긴장감은 덜하고, 무엇보다 아저씨가 아닌 오빠처럼 보일 수 있다.

밀리터리 패딩 말을 꺼내자 그는 '개장수' 같을 거라며 극도로 꺼린다. '개장수'라는 표현은 '포멀한 갑옷' 이외의 것을 거부하고 싶어서 대는 핑계 같다. 나는 절제된 색상의 것으로 선택하면 그렇지 않을 거라고 설득했지만, '포멀한 갑옷'을 입고 싶어 하는 그의 생각은 참 안 바뀐다. 

그런 모습으로부터 첫 번째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과제가 명확해졌다. 그가 책에서 배운 패션공식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매력을 알고, 스스로의 장점을 드러내지만 단점은 커버할 수 있는 룩을 직관에 의존해서 발견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었다. 

아무리 전문가들이 말하는 패션 공식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본인의 얼굴을 객관화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얌체'군은 아이보리, 회색 같은 컬러를 '지루한 색상(그의 표현에 따르면 Boring color)'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 '열정적인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지루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렇다. 그것도 자신의 '펀 오승' 얼굴 분위기와 만났을 때는 전혀 지루한 색상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다소 공격적인 그의 말투에 옷이 여백을 주는 역할을 해서 상대방과의 소통 의지를 유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과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면, 아무도 자신의 방에 들어오지 않아서 생기는 고독의 문제와 자존감의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해결되지 않을까.

04 Fun5 Face가 Good이 되는 법

'얌체' 군과 쇼핑을 하기 위해 SNS로 시간과 장소를 확정했다. 그는 쇼핑을 하기로 약속한 날 자신이 지금껏 좋아했었던 투머치 룩의 정수를 내게 선보이겠단다.

약속한 날 약속 장소에 '얌체' 군이 나타났다. 오 이런. 정말 과하다. 적갈색 바지, 황갈색 트렌치, 버건디 양말, 진갈색 로퍼, 잔잔한 체크가 들어간 화이트 셔츠, 그리고 안경에 끼운 선글라스 까지. 자기의 투머치 룩이 어떠냐며 연신 웃는다. 나도 그의 유쾌함이 좋아 깔깔 웃으며 셔터를 눌렀다. 

the

우리가 맨 먼저 정한 목표물은 스웨터였다. 바나나 리퍼블릭에서 다크 그레이에 가까운 검정 스웨터가 화이트 셔츠와 매치하면 어울릴 것 같아 찜하고 착용 사진을 찍어둔 후 몇 시간 후에 구매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보리 스웨터였다. '대범한 겁쟁이'군도 아이보리 스웨터를 선택할 때 상당히 애를 먹었었는데, 두 사람의 공통점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어느 정도 한 체형이라는 것이다. 아이보리 스웨터의 짜임이 울룩불룩하거나 과하면 팔이나 가슴 근육이 부각되어 과해보였다.    

우리는 다양한 아이보리 스웨터를 입어보고 난 후 아무런 꼬임 디테일이 없는 모 소재의 스웨터를 자라에서 찾아냈다. 아무런 디테일이 없는 면 소재의 스웨터도 후보에 올랐지만, 면이 모보다 무거워 몸에 착 붙는 바람에 가슴 근육을 너무 부각시켜 탈락했다.

the

the

자라에서 '얌체' 군의 모습을 찍어주던 내게 우연히 포착된 아이템이 있었다. 라이트 그레이 색상의 차가운 소재의 밀리터리 패딩 점퍼!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한 눈에 '얌체' 군에게 필요한 아이템임을 알아봤다. 아무 토 달지 말고 그냥 입어보라는 내 말에 (boring color라며)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는 젠틀하다.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기다리던 내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해줬다. 

the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약간 밝은 무채색이라는 색상이 그의 '펀 오승' 얼굴 분위기는 절제시켜주었고(심지어 그날 그가 입고 온 적갈색 치노팬츠까지도!), 밀리터리 패딩이라는 옷의 정체성 때문에 그는 나이 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밝은 색상은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그 옷을 입은 '얌체'군은 보는 이를 압도하지 않으면서도 시선을 끌만큼 멋져 보였다. 입을 땐 별로 내키지 않아하던 '얌체'군도 사진을 보더니 생각이 바뀐 눈치다. 개장수처럼은 보이지 않는다며 만족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제품을 구입하지 않았다. SPA 브랜드에서 겨울 아우터는 구입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중론. 대신 그와 비슷하지만  더 오래 입을 수 있는 고품질의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무인양품에 들러서 내가 미리 찜해둔 아이보리 머플러를 둘러보았다. '얌체'군은 보통의 남성 코트 스타일링에서 볼 수 있는 랩어라운드(길이가 절반이 되도록 접은 후 목에 두르고 접힌 부분에 긴 부분을 넣는 방식)로 맸다. 

내가 보니 머플러가 넥타이마냥 목을 조이는 것 같아 답답해 보였다. 그러지 말고 그냥 살짝 둘둘 감아보자고 했다. 훨씬 자연스럽다.

the

아이보리 머플러가 주는 매력을 이해한 '얌체'군은 그것을 구입했다. 어느 정도 쇼핑을 마무리 하고 휴식을 취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패딩의 색상이 자신의 얼굴을 중화시켜주는 느낌이 신선했나보다. 

"피부가 웜톤이니까 맨날 웜톤 색상만 찾았었는데 무채색 시도해보니까 또 다른 느낌이 나오더라구요. 얼굴에 가까운 건 웜톤으로 해야한다는 걸 공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쿨톤에 가까운 무채색을 얼굴 가까이에 대니까 기존의 Fun의 요소, 얼굴과 오늘 입은 이 바지가 어떻게 보면 더 보완되는 걸 느꼈어요. 너무 기존의 관념에만 갇혀있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을 배운 것 같아요. 여름에도 이런 식으로 해봤으면 참 좋겠네요."

화려한 색상을 선호하던 취향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단다.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Boring Color들을 더 잘 조합하는 게 색채를 화려하게 스타일링 하는 것보다 멋있다는 점을 배웠어요. 그리고 여전히 파란색과 노란색에 눈이 가지만, 그런 것은 옷으로가 아니라 '더하기의 법칙'에서 배운 것처럼 장갑, 양말 같은 아이템으로 시도해볼게요. 그럼 다음에 뵙게 될 때 신기한 아이템, 신발 한번 착용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포멀함을 내려놓는 도구로서 티셔츠를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나 보다. 

"제가 원래 '셔츠 성애자'라 셔츠 말고 티셔츠는 시도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티셔츠를 매치하는 걸 새롭게 배웠어요."

05 "제 멋에 사는 거죠, 그래도 타협은 해야죠."

'얌체' 군과 헤어진 후 나는 SNS로 쇼핑하며 내가 찍었던 그의 착용 사진을 공유해주었다. 그리고 각각의 컷 속에 담긴 그날의 새로운 시도를 SNS로 평가했다. 그는 패딩이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는 점도, 아이보리 머플러가 예상 외로 괜찮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가 '포멀한 갑옷'을 완전히는 내려놓지 못했겠지만 조금은 내려놓은 인상이다.

나는 '얌체' 군을 위해 그 날 자라에서 본 멋진 패딩의 고품질 버전을 찾기 위해 열심히 검색을 했다. 그는 내가 찾아낸 제품을 포함, 다양한 회색 패딩 점퍼를 매장에서 입어보았고, 그는 결국 꽤 멋진 패딩을 구입할 수 있었다. 

2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 나는 그가 새 패딩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다. 새로운 패딩을 입고 다시 만난 '젠틀한 얌체'군.

the

별칭을 정하고 상담과 쇼핑까지 몇 주가 흘렀기에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있었는지 의견을 들어봤다. 

"저는 사실 제 정체성이 불분명했던 건 아니에요. 그보다는 제 정체성에 대해서 계속 갈등했던 거죠. 원하는 방향이랑 실제 성격이랑 다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떻게 보면 계속 충돌을 하니까. 서로 상반되는 것끼리. 그런데 확실히 '젠틀해지고 싶어 하는 얌체'라고 중심을 잡고 나니까 편하죠. 지난번 그 선글라스를 쓰면서는, '난 원래 이런 거 좋아하니까'라며 쓰고, 사람들이 쳐다보면 '아 내가 튀니까 쳐다보나 보지'하고."

나는 그에게 옷 이외의 부분에서 '아 맞다, 나 얌체지?' 라며 생긴 변화는 없느냐고 물어 보았다.

"예전엔 '젠틀함=무거움'이란 생각이 들어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 되게 정중한 목소리로 인사했었어요. 그런데 요샌 그냥 가볍게 해요." 

그러고 보니 그날 '얌체' 군이 나에게 했던 인사는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Hi, 쌤! Hi, 쌤!'이었다. 그가 남의 시선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보면 남의 시선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진 않지만, 전에는 중심이 없었고, 이제는 중심이 좀 잡힌 것 같아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아직 큰 변화는 못 느끼고 있지만, 앞으로 달라지지 않을까요?"

쇼핑하던 날 투머치룩을 입고 나타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다 제 멋에 사는 거죠. 저는 그렇게 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다만 거기서 어떻게, 지난번에 말씀하신,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하느냐). 옷도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타협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말하면 타협하는 법을 배운 거죠." 

Fun에 대한 접근법도 달라졌단다. 원색이나 디테일만 Fun이 아니라 다른 것도 Fun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절충해서 Fun을 추구하면 되는 거니까. 보색대비라도 채도가 낮은 색상끼리 매치를 하는 것도 Fun인 거고, 반대되는 아이템끼리 매칭을 하는 것도 Fun인 거고. 그런 거죠. 아 그리고 이건 컨설팅 이후로 바뀐 건데 예전엔 무늬가 있는 니트 위주로 입었다면 요샌 단색으로 많이 입네요. 차분한 색으로."

자신의 얼굴과 자기 체형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객관화하는 부분은 좀 더 연습이 필요해 보였다. 그레이 진을 구입할까 하는데 과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에게 그레이 진이 그리 과하진 않지만 내 경우는 다리가 굵어 보일까봐 꺼린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그레이 진을 구입해야할지 고민을 한다. 자신의 하체가 다소 빈약해 가분수처럼 보이는 면이 있음을 이미 파악해놓고도. 

'남들에겐 그레이 진이 회피 대상이지만, 내 경우엔 체형을 커버해줄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변해야 한다고 설득을 아무리 해도,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단다. 타인의 스타일에 대해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날카로운 면이 있는 친구인데.

잘은 모르겠지만 책에서 체형에 관한 파트를 보면 그렇다고들 하니 용기가 나지 않는단다. 그래서 그에게 따끔하게 일러줬다.

"책에 나온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눈과 직관을 신뢰해야지!" 

책에서 배운 지식은 참고만 해야지 고정관념처럼 갇혀버리면 안된다고 하자, 지식을 공식처럼 적용시켜버리는 것이 자신의 문제란다. 잠시 후 이어서 하는 말. 

"그 공식이 남들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것이니 만큼 이젠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발전시켜야겠네요."

그런데 왜 그리 나이 들어 보이는 것에 극도로 민감한지 궁금해졌다. 

그에 대한 생각도 '암체'답다. 20대의 젊음이라는 것이 현재 자신이 가진 특권 중 하나기 때문에 최대한 누리고 싶단다. 나이 들어 보인다고 해도 그 특권이 사라지는 건 아닌데. 20대가 지나면 젊음이 끝날 것 같이 생각한다는 것도 20대 특유의 모습인 것 같다. 

사실 젊음이란 의미는 스스로가 부여하는 것이다. 나는 40대가 되고도 여전히 철없이 살다 보니, 남이 나를 어떻게 보든 '젊다'는 꽤 오래 써먹을 수 있는 표현임을 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산다. 아무리 내가 동안이라도 스물여덟은 아니고, 아무리 내가 노안이라도 마흔 다섯이 아님은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기에.

마찬가지로 남들이 '얌체' 군을 올드하게 본다 하더라도 '얌체' 군이 지금 그 나이라는 건 아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임을 상기시켜줬다. 그러자 하는 말. 

"저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게 이걸 더 붙잡게 만드네요." 

그도 30대가 되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젊음을, 그리고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꼭 20대라는 나이는 아님을.

몇 주 후, 나는 컨설팅을 받은 친구들과 조촐한 연말 모임을 가졌다. 모임에 참석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쌤, 저 컨설팅 받고 나서 제 나이를 찾았어요. 요즘엔 제 나이로 사람들이 봐줘요." 

우리는 즉석에서 그의 나이 맞히기 질문을 던졌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나이 근사치에 해당하는 답을 듣고 매우 흡족해했다. 

안경 이야기로 '얌체'군 스토리를 맺을까 한다.  사실 나와 함께 쇼핑하며 그가 얼굴 분위기를 중화시켜줄 안경을 착용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문득 운전 중에 들었던 생각. 얌체가 얌체로 살겠다는데 내가 그걸 막을 권력은 없다고. 

옷에서 그렇게 절제했음 됐지, 그가 안경으로 표현했던 '얌체'까지 다 억제할 필요가 있겠냐고. 그와의 만남이 늘 유쾌했던 난 그가 지금 이대로 충분히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었음을 갑자기 깨달았다.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져 운전 중 신호 대기 상태를 틈타 얼른 메시지를 보냈다. '얌체' 군에게 굳이 새 안경은 필요가 없겠다고. 지금 상태가 충분이 멋있다고. 그러자 그게 다 컨설팅 덕이라며 공을 내게 돌린다. 나는 그것을 부인했다. 

"컨설팅 덕분이라기보다는 '얌체' 군 자체가 원래 좀 멋있는 사람인거 같아요. 그리고 선글라스 쓰고 뻔뻔하게 다니는 그 태도 계속 유지했으면 좋겠다." 

그러자 '얌체' 군이 이런 답을 했다.

"잘 유지될 거예요. 얼굴이 FunFun해서!"

* 이 원고는 2015년 10월부터 2015년 11월까지 있었던 패션 컨설팅 스토리를 쓴 것입니다. 2년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 '젠틀한 얌체' 군은 여전히 자기 나이대로 살고 있고, 그 때의 패션 고민은 모두 해결되어, 지금은 기본 아이템 위주로 옷을 구매하면서도 만족도는 높다고 하네요.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