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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1일 13시 42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11일 14시 12분 KST

누가 아이유를 비판하고 방어하는가?

어떤 아이유 팬들은 '여초사이트에서 좌표를 찍어가며 아이유를 공격하고 있고, 진정한 아이유 팬들만이 아이유를 보호하고 있다'라는 주장을 한다. 역시 손쉬운 집단화고, 우스운 일이다. 전자는 명확한 근거가 없고, 후자의 경우 이 논쟁에서 아이유에게 호의적인 입장을 표한 허지웅이나 진중권이 딱히 아이유를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아이유에 대한 공격은 아이유가 소녀를 벗어났기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우스운 이야기다.

로엔엔터테인먼트

아이유의 새 앨범이 공개되고 인터넷은 아이유 담론에 의해 점령당했다. 대중들은 분노하고, 공격하고, 방어한다. 누군가는 아이유의 이번 앨범이 <노골적>으로, 빼도 박도 못할 정도로 소아성애를 조장한다고 한다. 나는 이 해석에 별로 동의하지 않지만 저런 주장이 우스운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소아성애적 코드의 혐의가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것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여기에도 별로 동의하지 않고, 상당히 위험한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우스운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실에서 아동에 대한 성적 접근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완전히 동의한다. 누군가 길에서 '초등학생이랑 하고 싶다'라고 외친다면 나는 높은 확률로 그 사람을 피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저 미친 소리에 진지한 주석과 철저한 논리를 준비해왔다면 그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볼 의향은 있다. 또 무슨 논쟁이 가능하더라. 여러 가지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아이유에 대한 논의. 소아성애에 대한 논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의. 한국 사회가 예술가와 여성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논의. 등등. 그리고 나는 이 논의들이 굉장히 생산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스운 꼴을 보이지 않는다면야. 하지만 우스운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아이유를 좋아해왔던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아이유를 싫어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유를 공격하는/방어하는 대중들'을 '어떤 구체적인 집단'으로 <손쉽게> 실체화하는 일은 조금 우습다. 가령, 어떤 페미니스트는 아이유를 소아성애 조장 혐의로 비판할 수 있다(가장 핫한 페미니즘 사이트 <메갈리아>에서 아이유를 검색해보면 아이유를 비롯한 소아성애 컨셉의 걸 그룹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의 글이 주로 나온다). 어떤 윤리주의자는 아이유를 소아성애 조장 혐의로 비난할 수 있다(기독교 윤리의 관점에서 동성애를 비난했던 어떤 소설가는 소아성애 혐의로 아이유 음원 철폐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저 소설가가 메갈리아의 회원은 아닐 것이다. 동시에 메갈리아도 저 소설가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호모포비아는 꽤 중요한 성정치 이슈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저 둘을 하나로 묶어 '아이유 까는 애들 그거 페미니즘 이야기하면서 동성애는 반대하는 분열증 환자 아니냐?'하는 것은 정말로 우스운 짓이다. 저 둘은 전혀 다른 존재다. 또한 아이유를 소아성애 혐의로 비판하는 집단이 저 두 집단으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아이유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극단적 윤리주의자다'라고 하나를 고르는 것 역시 우스워진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현재의 아이유를 비판한다. 예전부터 아이유의 '소아성애적' 행보에 반대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그냥 음악이 싫어서 싫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이유에 대한 방어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서 대중의 일부만을 언급한 채, '아이유를 까는/방어하는 사람들은 이러이러한 사람들이다'라고 진지하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충분히 우스운 일이다. 농담 삼아 할 수 있는 이야기 정도는 되겠지만.

아이유에 대한 공격과 방어가 지극히 한정적인 장에서 명확하게 적대하는 두 집단 간에 이루어지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손쉽게 집단성에 대해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단순한 사회 문제는 사회학 교양 교재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그야말로 아이유의 시대가 아닌가. 모두가 아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아이유 팬들은 '여초사이트에서 좌표를 찍어가며 아이유를 공격하고 있고, 진정한 아이유 팬들만이 아이유를 보호하고 있다'라는 주장을 한다. 역시 손쉬운 집단화고, 우스운 일이다. 전자는 명확한 근거가 없고, 후자의 경우 이 논쟁에서 아이유에게 호의적인 입장을 표한 허지웅이나 진중권이 딱히 아이유를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아이유에 대한 공격은 아이유가 소녀를 벗어났기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우스운 이야기다. 아이유가 <여성>이기 때문에 손쉬운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는 이야기에는 완전히 동의한다. 하지만 아이유가 소녀를 벗어나 아티스트를 지향했기에 대중들이 '더 이상 소녀이기를 거부한 아이유'에 분노한다는 이야기는 대체 무슨 소리인가. 이 이야기가 타당하려면 기존의 아이유 팬들이 이번 아이유의 앨범에 가장 분노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소녀 아이유'를 좋아하던 기존 아이유의 팬은 대체로 아이유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는 많은 아이유의 팬들이 아이유를 옹호한다고 해서 '아이유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이유의 팬들이다'라는 우스운 소리를 할 생각이 없다. 이는 필요조건/충분조건의 간단한 이야기다. 대중적인 분노는 각자의 이유와 맥락의 총체로 이루어지지, 단결된 의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중은 하나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아이유에 대한 입장부터 둘로 갈려있지 않는가.

대중적 분노란 언제나 혼란스럽다. 다채로운 사람들이 다채로운 이유와 소속이 적힌 깃발을 들고, 마찬가지로 다채로운 사람들이 다채로운 이유로 그들과 대치한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립 그 자체가 가지는 사회적 맥락들에 집중하거나, 대립에 참여하는 개인과 집단의 결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지 '저 사람들 다 이러저러한 사람들이야'라고 퉁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성적/인권 감수성이 약한 편인 한국에서, 이러한 문제제기가 거의 없던 한국에서, 왜 갑자기 아이유가 문제가 되었을까?'라는 문제의식은 상당히 흥미롭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이유로 아이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가?' 하는 문제도 충분히 흥미롭다. 그 결과로 '어떤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이러한 문제제기를 했으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러한 문제제기는 이러이러한 역학을 통해 공론화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훌륭하다. 결론까지 향하는 과정에서도 꽤 많은 생산적인 논쟁이 존재했을 것이고, 그 결론이 또 다른 논쟁에 생산성을 부여하기도 할 테니까. 하지만 아이유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대중 속의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파편을 망상 속에 그러모아 혼자만의 괴물을 만들어내고, '아이유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이렇다'라고 하지는 말자. '누가 아이유에 대한 문제제기에 반론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꿈속의 괴물과는 혼자 꿈에서 싸울 일이지, 함께 논쟁할 일은 아니다. 다시 '성적/인권 감수성이 약한 편인 한국에서 왜 갑자기 아이유가 문제가 되었을까?'로 돌아가 보자. 감수성이 약한 '한국'의 모든 구성원의 성적/인권적 감수성이 약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해 왔고 어떤 사람들은 묵인해왔으나 모두가 이를 묵인해온 것은 아니다. 사회의 양상으로부터 개인들의 속성을 손쉽게 규정하는 것을 사회학 용어로는 '생태학적 오류'라고 하고 인터넷 용어로는 '관심법'이라고 한다. 문제와 묵인 사이의 어떤 역학이 변화한 것이지, 개벽천지가 일어나 모두가 마음을 바꾸거나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입장들은 정말로 많다. 아이유의 극성 팬에서 전통에 충실한 윤리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싸움이야? 나도 끼어야지! 를 외치며 싸우러 올 사람들을 환영한다. 싸움은 원래 멍청한 일이기에, 수많은 멍청한 소리들도 환영한다. 나도 멍청한 소리를 늘어놓을 테니까. 하지만 우스운 일은 벌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