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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6일 08시 33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26일 14시 12분 KST

다시 한번 신해철을 보내며

HPK

어떤 이의 죽음은 세상에 큰 구멍을 남긴다. 신해철이 죽었다. 세상에 구멍이 났다. 그 구멍으로 폭포처럼 언어가 쏟아진다. 한결 같이 그리움이 고이고 또 고인다. 깊고 너른 상실감 속에서 사람들은 신해철이 남긴 노래와 말을 유언처럼 되짚고 되새겼다. 신해철을 다시 읽는다.

지난해 JTBC에서 방영한 <속사정쌀롱>을 봤다. 1회였다. 신해철이 있었다. 살아서 웃고 있었다. 따라 웃다가 끝내 울컥했다. 죽은 신해철이 산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실감이 났다. 타 들어가는 성냥의 끝자락을 보는 기분이었다. 정말 마지막이구나. 속이 쓰렸다. 신해철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14년 10월 27일 저녁 무렵 방콕의 공항에서였다.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다가 나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다. '속보'와 '신해철'과 '사망'이란 단어가 일렬로 나열돼 있었다. 전광석화처럼 달려든 비보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갑자기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비행기는 두 시간 연착됐다. 하늘도 우는 것 같았다. 거짓말 같은 소식 한가운데에서 거짓말 같은 생각만 떠올랐다. 다음날 집에 돌아와 신해철의 음반을 찾아봤다. 마치 깃발이 없는 깃대를 보는 기분이었다. CD 하나를 집어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신해철은 노래했고, 나는 코끝이 시큰했다. 과거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던 신해철은 '욕을 많이 먹으니 죽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유세윤의 말을 이렇게 받았다. "불노불사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세상에 회자될 슬픈 농담 하나가 연착된 비행기처럼 뒤늦게 더해졌다.

신해철이란 이름을 알게 된 건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그는 솔로 앨범을 낸 인기 가수였다.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먹은 가수이기도 했다. 나름 곱상한 외모에 커피잔을 들고 있는 사진이 커버로 쓰인 그의 1집 앨범은 초등학생이 보기에도 그냥 평범했다. TV에 나와서 노래하는, 잘 나가는 인기가수처럼 보였다. 그러다 2집 앨범 활동 중에 대마초를 피워서 경찰에 붙잡혔다고 뉴스에 나왔을 땐 어른들이 혀를 차는 소리를 들었다. '머리가 길고, 옷차림이 불량하고, 저럴 줄 알았지'란 식이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왜 저렇게 됐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신해철이라는 가수를 정말 좋아하게 된 건 조금 머리가 굵어진 중학생 시절이었다. 넥스트(N.EX.T)의 2집 앨범인 < The Being >은 내 인생에서 가장 처음으로 접한 명반이었다. 록이 뭔진 잘 몰랐고 그냥 넥스트의 음악이 좋았다. 그리고 가사를 정말 좋아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의 내가 좋아했던 신해철의 가사를 다시 보면서 그 시절에 그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생각했다. "난 아직 내게 던져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곤 속에 묻어버릴 수는 없어. 언젠가 지쳐 쓰러질 것을 알아도 꿈은 또 날아가네. 절망의 껍질을 깨고." 이게 열네 살짜리 중학생이 즐겨 부를 만한 노래 가사인가. 확실한 건 그의 언어가 학창시절부터 나를 움켜쥐고 흔들었다는 사실일 게다. 신해철은 항상 나 자신의 존재적 가치에 대해서, 나 자신이 취해야 할 삶의 노선에 대해서 노래했다. 나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잘 알게 됐을 때 그것을 방해하는 세상과 맞서서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곤 직접 최전선에 서서 자신을 짓누르려는 사회의 편견과 맞서서 싸우면서도 스스로를 보존해낼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선생님도, 부모님도 알려주지 않던 삶의 방식이었다. 오히려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겐 쳐다봐서도 안될 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신해철은 기성세대에게 내 자식을 이상하게 물들이는 나쁜 친구 같은 취급을 받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흔히 신해철을 독설가라고 말한다. 독설가는 '남을 해치거나 비방하는 모질고 악독스러운 말을 잘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해철이 남을 해치거나 비방하는 모질고 악독스러운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신해철은 항상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선 어떤 것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신해철의 독설이란 그런 자유를 억압하는 집단이나 힘을 향해 있었다. 불법 다운로드를 받았으면 음악적 평가를 '닥치라'고 일갈했고, 동방신기와 비의 노래를 유해매체로 지정하지 말고 국회를 유해매체로 지정하라고 주장했으며 사회적 환경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백수가 일방적으로 게으르다 비난 받아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지성을 바탕에 둔 예리한 주관을 정확하게 빼 들었다. 말을 아끼지도, 몸을 사리지도 않았다. 불합리하게 권력을 휘두르며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거나 집단의 논리로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에 대해서 결코 참지 않았다. 이를 테면 안정환이 경기 중 관중석에 난입한 것을 두고 스포츠 선수로서 팬에 대한 존중이 없다고 질타를 받을 때 그가 관중석에 난입한 것은 가족을 욕한 관중 때문에 참을 수 없었던 것이기에 그는 이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신해철의 언어는 미디어를 통해서 숱하게 왜곡 당했고 대중은 손쉽게 그 언어를 폄하했다.

반대로 그는 개인을 대상으로 말을 걸 땐 격려와 위로를 전하는 사람이었다. 흔히 독설이라 일컬어지는 그의 언어가 대부분 기득권의 폭력과 불합리에 맞섰다는 건 그에 억눌린 개인의 편에 선 목소리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말은 동일한 의지를 표명한 이들과의 연대이자 응원이며 위로였다. 트위터에서 음악을 한다는 후배가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고 하소연하자 신해철은 이렇게 답했다. "세상을 바꿀 힘은 없어도 세상의 일부인 자신을 바꿀 힘은 있지 않겠냐." 신해철은 강자에겐 강자의 언어로, 약자에겐 약자의 언어로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었다. 다만 이 모든 언어가 자신의 내면을 향한다는 점에서 그는 건강한 자아의 보존을 통해서 건강한 세계의 형성을 추구했던 이상주의자였다.

신해철은 넥스트를 해체한 뒤로 4년간의 영국 유학을 떠났다. 인기 절정의 밴드가 해체된 것도 아쉬웠지만 솔로 활동으로도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뮤지션이 홀연히 유학을 떠난다는 건 굉장히 기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레시브 록과 메탈로 다진 음악적 아성을 뒤로 하고 영국에선 테크노 사운드를 파고 들었고, 끝내 '크롬(Crom)'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앨범들은 상당한 음악적 역량을 과시했다. 그는 한 자리에서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정진하는 뮤지션이었다. 그래서 <백분토론>에 나간 것을 후회한다고도 말했다. 세간의 언어에 휘말리면서 음악에 집중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참기 힘든 세상을 향해 말하고 또 말했다. "이 사회에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런 걸 겉으로 숨기고 쉬쉬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거지.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문제를 안 만들어요. 숨기는 사람들이 문제를 만드는 거예요." 그런 목소리가 사라졌다.

어차피 누구나 죽는다. 모두 다 언젠간 사라질 운명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은 어느 개인의 소멸이 아니라 어떤 우주의 상실이 된다. 신해철의 죽음이 그렇다. 신해철의 노래는 이 세상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지만 결국 이 세상에 속한 나와 당신 자신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는 이 세상의 변화는 개개인의 변화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신해철의 죽음은 존 레논의 죽음과 유사한 상흔을 남긴다. 세상에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내는 죽음이다. 정당한 언어로서 세상의 부당함에 맞서고, 공정하지 못한 기준에 저항하고, 불합리한 윽박을 위트 있는 유머로 대항함으로써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는 노래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드물고 귀하다. 귀한 사람의 죽음이자 귀한 언어의 소멸이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다 6년 만에 로 카메라 앞에 선 그는 말했다. "여러분이 나를 못 본 사이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들을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딸이 아홉 살, 아들이 일곱 살일 때 들려주던 이야기를 스무 살에도 들려주고 싶다. 공부든 학교든 돈 못 벌어도 좋으니까 아프지만 말아라.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그런 그가 아픔을 호소하다 세상을 떠난 것이 벌써 1년이 지났다. 울컥함은 잦아들었지만 그의 노래와 말에서 느껴지는 절절함이 여전히 깊어 땅이 꺼질 것만 같다. 그래도 어쨌든 산 사람은 두 발을 딛고 살아서 명복을 비는 수밖에 없다. 부디 음악만 해도 되는 곳에 다다랐길. 당신을 잊지 못할 겁니다.

(ELLE KOREA에 게재했던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