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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18일 09시 29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19일 14시 12분 KST

'남자 페미니스트' 선언은 바라지 않습니다

baona via Getty Images

아시다시피 제가 맨날 노래부르는 것이, 남자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지는 노상관이고, 한국에 만연한 여성혐오 문화를 '고쳐야 한다'는 인식이 있으며 여성을 같은 사람으로서 존중만 해줘도 좋다는 주장입니다. 이건 남자들이 여권 문제에 있어서 포지셔닝이 까다로운 것을 자주 봐와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룻밤에 모든 생각이 다 바뀌진 않죠.


어떤 누군가가 보수였다가 진보쪽으로 조금 방향이 틀어졌다고 할 때, 하룻밤에 모든 생각이 다 바뀌진 않죠. 머리에 총 대고 사상변환 안 하면 죽인다고 하지 않는 이상은, 이슈 한두 개에 공감하고, 그러면서 그쪽 생각을 조금 더 듣게 되고, 그렇게 천천히 변하는 게 보통이지 어제는 어버이연합이었다가 오늘은 열혈 진보 그런 일은 현실에서 없습니다. 있다면 그 사람이 보통 좀 이상한 경우고요.

남자 입장에서 봅시다. 여성도 사람이니까 동등하게 대해 달라는 데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합니다. 여성이 차별을 받고 있느냐 아니냐는 아직 싸우는 사람들 있죠. 그런데 이전에는 여성 인권에 별 관심 없이 살아온 사람이 강남 살인사건 이후로 조금 관심이 생겼다고 합시다.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을 선하고 좋은 존재로 봅니다. 그러므로 '여성 인권에 관심을 보이는 자신'을 좋게 보겠죠. 그런데 페미니즘 관련 이슈는 남자로서 불편한 내용이 많습니다. 남자 니네는 편하게 살잖아, 위협받지 않잖아. 이런 말을 들으면, 난 사실 여자들 밤길 위험하다는 거에 공감해주고 나쁜 놈들 욕해주려고 했는데 왜 나보고 편하게 살았다면서 공격하지? 왜 날 나쁜 사람 만들지? (이게 바로 "말 곱게 해주면, 그러니까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깨지지 않게 말하면 들어줄 수도 있잖아" 논리입니다.)

다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최고 빠른 방법은 그 방식이 당연한 사회에 혼자 집어넣는 겁니다. 한국에서 여혐 발언 인종차별 발언을 하는 사람들, 여성 인권 높은 사회에 가서는 곧바로 입조심하지요. 반대로 해외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와서 웬만한 여혐 한국남 부럽지 않은 수준에 닿기도 하고요.


남자로서 자기는 페미니스트라 말하기 쉬운 분위기 아닌 거 알거든요.


저도 사실 그래서 1:1로 설득하기보다는 사회 전체 분위기와 시스템을 바꾸는 쪽으로 늘 말합니다. 이제 여성인권에 관심 가지기 시작한 남자로서 자기는 페미니스트라 말하기 쉬운 분위기 아닌 거 알거든요. 정말 이기적으로 남자 입장에서만 봅시다.

페미니스트라 선언함 ⇒ 이제부터 말하는 거 다 감시당할 거 같음. 뭐 하나 잘못하면 과격한 몇몇 페미들은 '남자 페미니스트가 그렇지' 혹은 '여자 꼬셔보려고 어찌 하더니 바닥 드러난다' '역시 뭣도 모르면서 지가 페미니스트네 뭐네 말했지라'라고 공격하기 쉽습니다. 입만 살아서 페미니스트지 실생활에선 성추행에 데이트 폭행기록이 화려한 남자가 많기도 하고요. 또 남자 입장에서 여성의 삶을 백퍼센트 이해하기 힘들다 보니까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뭔 말을 하면 의도는 좋았더라도 삑사리 나기 쉽죠. 그러면 또 얻어맞고요. (이건 제가 공대 남자를 많이 알아서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의도는 좋은데 센스 없어서 말 잘 못하는 남자들 참 많이 봐요.) 같은 남자에게서는 여자에게 잘 보이려 별걸 다 한다 소리 듣습니다.

반대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안 하면요? 평소 발언을 덜 검열해도 됩니다. 어차피 한국은 여혐사회라서 여성인권에 조금만 관심 보여도 보통 남자와는 다르다고 좋게 봐줍니다. 가부장제 시스템에서 나한테 편한 것은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이기적으로 남자 입장에서만 보자면, 페미니즘 담론엔 관심이 아예 없는 척하면서 여성의 인권 문제에 '에이 그건 진짜 옳지 않다! 좀 고치자' 한마디 하는 것이 개인의 이익 최대화입니다. 그래서 이해합니다. 확 더 나서서 편들어주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거 압니다. 그러니까 이슈가 되는 차별적 관행과 조직적 피해에 대해 말이 나올 때 조금씩만 편들어줘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페미니즘 전체에 동의한다 말하라는 강요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페미니스트라 해주시면 더 좋고요!)


한 마디만 해주세요. "다른 분들이 불편할 수 있는 발언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남자분들에게 부탁 하나 드립니다.

며칠 전에 약 400명이 모인 공식 챗방 대화기록을 봤습니다. 점점 대한민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는 식으로 말이 흐르니까 남자 한 분이 스톱시킵니다. "논란이 될 만한 말은 지양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혐 발언은 거기에서 정리되었습니다.

저는 남자분들께 딱 이것 하나만 바랍니다. 챗방에서 헛소리 하는 사람들 나올 때, 내 너를 단죄하리라는 식으로 키배 벌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한 마디만 해주세요. "논란이 될만한 말, 다른 분들이 불편할 수 있는 발언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거 한 번이면 됩니다.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말 안 하셔도 됩니다. 다른 남자들 보고 '야 너 여혐 하지마' 일갈 안 하셔도 됩니다. 누가 따지면 '이런 거 스샷 떠서 양파 페이지 같은데 뜨면 (...) 귀찮아져!' 하셔도 되요. '여기 사람들이 몇인데 여혐러들이라고 딱지 붙으면 요즘 세상에 우리가 뭐가 돼!' 하셔도 되고요. 아무 이유 갖다 붙이셔도 됩니다. '그런 말 하지마'만 전달되면 돼요.


나는 페미니스트다 뭐 그런 대단한 선언 바라지 않습니다.


각자들 단체 카톡방 몇 개씩 가입되어 있으시죠? 그중에서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김치녀들이 어쩌고 욕하거나 야한 사진 보내고 다른 직원 후배 얼굴 평가하고 몸매평가하는 꼴통 있기 마련이죠 (없으시다고요? 뭐 그런 청정지역이 있나. 연락주세요. 우리 단체 소개팅 좀 주선해봅시다;;). 연장자나 윗사람에게 대드실 필요도 없어요. 나이 어린 애가 그럴 때 그냥 한 마디 해주세요. 남자분. 그리고 여자분들의 남친, 남편, 동생, 남사친들. 저 위의 400명 챗방에서 저 분이 한 마디 해주시는 바람에 400명이 '아 이런 얘기 막 하면 안 좋은 소리 듣는구나'를 봤습니다. 챗방 중에 대학교 동아리, 직장 모임 많을 거잖아요. 한 번씩만 분위기 바꿔주세요. 여자가 말하면 못생긴 게 히스테리 메갈쿵쾅 정신병 어쩌고 하지만, 나이 많은 남자, 윗사람이 한마디 하면 분위기 정리되는 거 아시죠.

나는 페미니스트다 뭐 그런 대단한 선언 정말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죄인이오 딴 남자들 대신해 사과하오 이런 것도 필요 없고, 주위 남자들과 주먹질 안 하셔도 됩니다. 요것만 해주셔도 감사하고, 점점 사회 분위기 변해갈 때에 딱 반 발자국만 앞에 서서 아직 뒤쳐진 남자분들 살짝 끌어주시면 그게 제일 큽니다.

부탁드립니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