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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12일 13시 02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5월 12일 14시 12분 KST

예술치유 이야기

표현은 감상보다 더 적극적인 치유 행위입니다. 일기장을 펴놓고 마음에서 느껴지는 대로 글을 쓰고 나면 무언가 해소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쓰는 과정에서 내가 애써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피하던 문제가 드러나면, 그것을 대면할 용기도 생기고, 자기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새로운 시야도 열립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글쓰기 전문가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대로 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대는 것입니다. 검열 없이 말이죠. 글쓰기 뿐 아니라, 좋아하는 악기를 신나게 연주하거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춤을 추거나, 도화지에 손 가는 대로 그림을 그려보거나, 진흙을 만지며 그릇을 빗는 것도 재미있는 치유 행위입니다.

예술치유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치유란 무엇일까요? 치유는 영어로 힐링(healing)입니다. 힐링은 그리스어 '홀로스(holos)'에서 유래했습니다. holos는 holy(신성한, 영적인), whole(전체성)을 의미합니다. 건강(health)와 어원이 같습니다. 치유는 신체적·정신적·영적인 불완전 상태가 전인적으로 건강한 상태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본래의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치유이죠. 치유와 유사한 개념으로 치료가 있습니다. 치유는 치료와 대비해서 볼 때 그 특성이 더 잘 드러납니다. 치료는 영어로 테라피(Therapy)입니다. 테라피는 'therapeai' (도움이 되다, 병을 고쳐주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치유와 치료는 유사한 개념입니다. 하지만 치유가 경험적·정서적·영적인 개념이라면 치료는 과학적·의학적 개념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술과 약물치료로 회복이 어려운 암환자가 있다고 하죠. 이 환자는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는 현생을 묵묵히 정리하며,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하고, 병으로 인한 고통을 다스리며,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 속에, 감사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이 환자는 '치료'되지는 못 하지만 '치유'될 수는 있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남보다 빨리 맞이했을 뿐, 암이라는 치명적인 병으로 인해 이 환자는 더욱 성숙하고 온전한 인간으로 내적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런 변화로 인해 기적적으로 암에서 회복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다소 극단적인 비유이지만, 이 비유를 통해 치유와 치료의 차이점을 비교적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치료는 의학적 처치이며, 치유는 내적으로 온전해 지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술치유는 예술을 통해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인 치유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술치유의 주된 관심사는 예술적 경험을 통한 참여자의 치유적 변화입니다. 그래서 예술치유는 예술행위의 결과물로서의 작품보다 예술행위라는 내적 과정을 중시합니다.

예술은 원시적 제의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원시 제의는 의술과 종교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먼 옛날 예술, 의술, 종교는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모체라는 것만은 분명했죠. 선사 시대 동굴벽화나 암각화들은 매우 사실적이고 표현적인 원시 미술일 뿐 아니라, 치료 의식이나 풍요 의식에서 마력을 발휘하는 신성한 그림들이었습니다. 가죽으로 만든 북, 뼈로 만든 피리, 뿔로 만든 나팔같은 악기들은 영혼을 부르는 신성한 소리들이었고, 이 소리를 따라 집단적 가무와 극적 행위가 제의 현장에서 펼쳐졌습니다. 원시 제의는 공동체의 신성한 종교의식이자 치료의식, 그리고 예술축제였습니다. 인간은 원시적 제의를 통해 우주와 연결되고, 그 힘으로 개인적 질병과 공동체의 재난을 물리친다고 믿었습니다. 예술은 그 기원에서부터 치유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시적 제의 행위에는 샤먼이라는 불리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샤먼은 주술의사이자 예술가이기도 했습니다. 공동체의 치유자이자 인도자였죠. 종교학자 엘리아데에 따르면, 샤먼은 트랜스 상태에서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거나 지하세계로 내려간다고 믿어집니다. 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주문을 외고, 체온을 조절하거나, 환각제를 이용해 엑스터시 상태에 듭니다. 그리고 하늘과 지하 세계의 신성한 힘에 연결되어 환자의 병을 고치고, 죽은 자의 넋을 저승으로 돌려 보냅니다. 엘리아데는 고대 샤머니즘의 기원을 중앙아시아로 봅니다. 샤머니즘은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무속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죠. 부여, 고구려, 삼한의 제천의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었는데, 이 제천의식 역시 샤머니즘이 발전한 형태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샤머니즘은 동쪽으로 동북아시아를 넘어 아메리카 대륙으로 전파되고, 서쪽으로 소아시아를 거쳐 고대 그리스로 건너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로 건너간 샤먼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잘 알려진 망아(忘我)의 축제입니다. 그리고 이 주술적 제전은 그리스 연극으로 발전합니다. 샤머니즘은 세계 문명의 저류에 흐르고 있습니다.

원시제의의 치유과정은 참여자의 표현(춤, 노래, 이야기, 그림 등), 치유적 개입자의 존재(제사장 또는 샤먼), 치유적인 환경(제의 형식), 치유과정을 공유하는 집단의 존재(부족)을 그 구성요소로 합니다. 이는 오늘날 예술치유의 구성요소인 참여자, 예술행위(표현과 감상), 치유전문가의 개입, 치유적인 환경이라는 요소와 유사합니다. 이 관계 속에서 예술치유작업이 이루어집니다. 원시제의는 공동체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집단적인 치유를 통해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집단예술이기도 했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치유의 예술이었던 것이죠.

선사시대 이후 고대 세계에서도 예술은 치유의 도구로 쓰였습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신비 상태에 이르기 위해 우주와 하나가 되는 특별한 의식을 행했는데, 이 때 사용되던 음악이 베다 찬트였습니다. 베다 찬트는 매우 정확한 음정으로 불러야 했습니다. 음정이 불안하면 몸과 마음, 정신 간의 균형 회복이 어렵다고 보았죠. 라가는 특정한 기분, 심리상태, 기질을 조율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믿어졌고, 특정한 상황과 시간대에 맞는 특별한 라가를 불러야 했습니다. 인도의 라가 선법은 의학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이탈리아 남부 크로톤에 공동체를 만들어 살았습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영혼의 환생을 믿었습니다. 청정한 삶을 통해 윤회로부터 벗어나길 원했죠. 그래서 이들은 엄격한 정신적 신체적 식이요법을 행했고, 조화가 깨져 병이 생기면 신체적 균형은 의술로, 정신적 균형은 음악으로 바로잡았습니다. 균형과 조화의 회복이 곧 치유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하늘의 별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며 소리를 낸다고 믿었습니다. 천체 음악이죠. 평범한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입니다. 피타고라스는 현의 수학적 길이와 소리 사이의 관계를 발견해 음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조화란 수학적 비율의 문제였고, 숫자가 사물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리고 음악은 이 천체를 반영하는 소우주였습니다. 수학적인 우주였죠. 우주의 조화로운 질서를 반영하고 있는 음악은 좋은 영혼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피타고라스 이후 고대 그리스에는 예술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두 현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입니다. 음악을 예로 들어 보면, 플라톤은 음악을 구성하는 기본 재료인 '선법'으로 권장할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을 구분했습니다. 부드러움, 나태함, 슬픔과 한탄을 만드는 선법인 리디아와 믹소리디아 선법은 규제하는 반면, 절제와 용기를 고무시키는 도리아와 프리지아 선법은 권장했습니다. 젊은이에게 멜랑꼴리한 단조의 음악은 규제하고, 밝고 진취적인 장조의 음악은 권장한 것이죠. 플라톤의 생각은 음악을 통해 대중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주의 국가, 광적인 종교집단, 독재국가 등에서 행한 예술 검열이 플라톤적 조정의 관점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이상국가에서 예술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풍속을 어지럽힌다고 말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음악이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는데 사용돼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운동으로 육체를 단련하듯이, 음악으로 영혼을 교육해야 했습니다. 이는 플라톤의 관점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감각적 쾌락을 제공하는 미학적 기능, 표현하고 배설하는 카타르시스 도구로서의 치료적 기능에도 주목했습니다. 예술에는 공포와 연민의 간접경험을 통해 동일한 감정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았죠. 아름다운 모방으로 정서를 고양하고, 격정적이고 슬픈 모방으로 카타르시스를 경험합니다. 동질성의 원리와 카타르시스는 음악치료의 두 가지 기본원리입니다. 동질성의 원리는 정서적 상태와 에너지 레벨에 맞는 음악을 사용해 치료하는 방법입니다. 내적 세계의 음악적 모방으로 일체감의 쾌감을 주고, 부정적 감정을 부정적 음악을 통해 재경험해 카타르시스에 이르는 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심리적 문제를 발달적인 맥락에서 보곤 합니다. 한 개인의 심리적 문제가 생의 초기단계인 첫 3~5년 사이에 형성된다고 보는 것인데, 우리 속담처럼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것입니다. 신생아의 의식은 환경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고 융합되어 있는 원초적 낙원입니다. 자아는 완전히 잠들어 있죠. 아기는 어머니와 미분화되어 있습니다. 그 세계에서 아기는 전능하다고 느낍니다. 울면 먹을 것이 생기고, 따뜻하게 안아줍니다. 어머니를 조정해 자신의 세계를 자유롭게 다루죠. 하지만 그 낙원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자신과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성장에 따라 자기 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옷을 깨물면 아프지 않은데, 자기 손가락을 깨물면 아프다는 사실에서 발견하는 자기 개념 같은 것이죠. 하지만 곧 자기와 비자기 사이에 경계를 긋고, 경계 안의 것은 자기와 동일시하여 강화하고, 경계 밖의 것은 배제합니다. 자기라는 가면을 쓰고 비자기를 배제하는 것인데, 이 때 배제된 것들은 그림자로 남습니다. 이 그림자는 가면 뒤에 감추어진 인격으로서, 자기 인생에 대한 불만족 혹은 괴로움이 의식되면, 잠에서 깨어 납니다. 그리고 자아에 영향을 미치죠. 그런데 자기라는 가면은 사실 가면일 뿐입니다. 가면을 벗을 때 자기는 크게 확대되고,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게 되며, 보다 자유롭게 열린 감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와 타자 사이의 이 경계를 발견하고 지우는 일, 이것이 자기와 비자기의 통합입니다. 심리적 치유에서 지향하는 경지죠.

미적인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감지하는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아는 것, 느끼는 것이죠. 예술은 미적인 것을 감지하고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미적인 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깊이 몰입한 상태인데, 그런 몰입의 순간에 나와 대상 간의 관계가 깊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이는 유아가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와 유사하여, 생각하지 않고 단지 알아채는 경험을 제공합니다. 비언어적이고 전언어적이며 비논리적인 경험이죠. 이와 같은 미적 경험은 자기 통합에 도움을 줍니다.

정신적 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대상으로 특수한 환경에서 전문 예술치료사들이 시행하는 치료도 있습니다. 하지만 병원치료를 요하는 환자가 아닌, 단지 심신이 아프고 스트레스가 심한 사람들에게 예술은 치유적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술의 즐거움, 그 자체가 치유적입니다. 물론 즐거움에도 두께가 있습니다. 표피적이고 말초적인 즐거움에서부터 진실을 대면하는데서 오는 깊은 감동의 즐거움도 있지요. 잠깐의 스트레스 해소에서부터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행동변화로 이끄는 예술경험도 있고요.

우리는 예술작품 감상을 통해 정서적인 환기나 심리적 지지를 받습니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통해 눈물을 쏟아 내거나 깊은 감동으로 가슴이 울리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죠. 이 과정에서 심적 결함을 대면하고 조화를 회복하기도 합니다. 명작을 읽으며 새로운 관점으로 자신과 상황을 인식하거나, 슬픈 음악을 들으며 나의 슬픔을 깊이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행복한 치유 행위입니다. 우리에게는 선사 시대 이래 빛나는 예술 작품이 무한대로 남아 있습니다. 너무 많아 이 생에서 모두 감상하기 버겁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괴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게 절실한 것은 꼭 만날테니까요.창작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감수하는 직업적 예술가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면, 내게 즐거운 것을 골라 보는 재미,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은 남겨두는 여백도 즐길 수 있습니다.

표현은 감상보다 더 적극적인 치유 행위입니다. 일기장을 펴놓고 마음에서 느껴지는 대로 글을 쓰고 나면 무언가 해소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쓰는 과정에서 내가 애써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피하던 문제가 드러나면, 그것을 대면할 용기도 생기고, 자기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새로운 시야도 열립니다. 단지 생각나는 대로, 느끼는 대로, 규칙적으로, 쓰는 것만으로도 그렇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글쓰기 전문가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대로 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대는 것입니다. 검열 없이 말이죠. 이것은 자기를 대면하고, 정화하고, 사랑하는 힘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글쓰기 뿐 아니라, 좋아하는 악기를 신나게 연주하거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춤을 추거나, 도화지에 손 가는 대로 그림을 그려보거나, 진흙을 만지며 그릇을 빗는 것도 재미있는 치유 행위입니다.

놀고 표출해야 창조성이 살아납니다. 일과 공부만 시키면서 창조적이 되라고 말하는 것은 연목구어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억압하지 말고 표현해야 합니다. 꽃이 피어나며 자신을 표현하듯이, 우리 이야기를 꽃피우는 것이 인생입니다. 예술치유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우울과 불안을 치유하며, 공동체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폭넓게 쓰이고 있습니다. 예술의 치유적 힘을 전인적인 건강 회복의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이죠. 예술을 통한 자유로운 표현은 배설과 해소의 즐거움과 함께 자기 통제력을 증진시켜 정신 건강의 수준을 높입니다. 예술 활동은 공동체를 강화하고, 공동체 구성원의 유대감을 증진시키며, 정서적·정신적 빈곤을 해소해 삶의 질을 높여줍니다.

치유 과정은 장기간의 내적 변화로 일어납니다. 또한 개인과 공동체의 치유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온전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건강과 치유를 원합니다. 이에 대한 상업적이고 표피적인 대응이 아닌, 진정한 치유의 도구가 필요합니다. 예술은 그 기원에서부터 치유적이었습니다. 타인을 위한 꿈꾸기가 필요한 시대, 예술은 자신을 위한 고독한 몰입의 선물일 뿐 아니라, 타자를 위한 즐거운 해방의 선물입니다. 자신에게 가까워지면서 타인에게도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행복, 휴>(인물과사상사 2014년) '즐거운 해방, 예술치유 이야기'에서 발췌,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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