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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7일 07시 20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12월 17일 14시 12분 KST

나의 북한 방문기 2편 | '움직이는 새장' 안에서 보이는 것

평양을 빠져나가면 오직 몇십년 전 시대 같은 농촌 풍경만 펼쳐지는 북한. 그런데 연일 신문과 TV의 국제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핵을 쥔 몬스터 북한. 이 차이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농촌 풍경과 함께 마주친 대부분의 사람이 평생 보지 못할 것 같은 평양의 마천루, 그리고 이 나라의 어딘가에 있는, 우리가 접근조차 못하는 핵무기 개발 시설. 넉넉지 못한 나라의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고 있는 이 두 곳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농촌 풍경의 낙차는 무엇일까.

아시다시피 북한에서 취재는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 행동, 단독 행동은 허락되지 않는다. 우리가 묵은 평양역 앞의 고려호텔에서 백미터 가까이에 있는 식당에 갈 때도 버스를 타고 집단으로 이동한다. 돌아오면 외무성 담당자가 호텔 입구에 서서 "허가 없이 나가지 말라"고 말한다. 국내선 비행기에서는 일반인과 옆자리에 앉기도 했고, 지방 도시에서 취재 중에 일반인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쉽게 말을 건넬 수 없다. 인사 정도라면 몰라도 특히 정치적인 질문은 엄금이다. 마치 움직이는 새장 안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평양에 도착한 첫날인 9월 15일, 외무성 담당자는 호텔에서 기자들에게 엄명했다. "조-일 관계를 훼손시키는 행동은 하지 마십시오. 방송된 것을 보면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것도 많습니다.우리 공화국의 최고 존엄, 사회주의제도의 중상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사진 촬영도 양심적으로 판단하십시오. 이번 방문 목적인 성묘 취재에 집중하고 성과를 내시기를 바랍니다."

자존심이 강한 북한 관리들은 차 안에서 기자들이 차창으로 촬영하는 것도 신경을 쓴다. 가난한 옷차림의 아이들, 트럭 짐칸에 집단으로 실린 사람들 등을 찍으려고 하면 "그런 것을 찍으러 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일갈한다.

하지만 차를 타는 시간도 꽤 오래 됐다. 거의 하루 종일 타고 있으면 기자들 감시를 맡고 있는 안내인도 졸고, 이윽고 차창의 촬영 자체에 관심을 잃은 듯했다. 걱정했던 사진과 기사의 사전 검열도 없어서 모든 사진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런 자유롭지도 못한 취재에 높은 취재비를 내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비판도 받았지만,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제한이 많은 취재에도 보이는 것은 있다.

대규모 빌딩 건설이 잇따르고 자본주의국가 수준의 레저도 즐길 수 있는 평양과, 지방 도시의 경제 격차는 또렷하다. 간선 도로만 해도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곳도 많다. 버스 좌석에서 몸을 날리는 듯 흔들리며 산길을 달리자 허리가 아팠다.

지방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자전거와 소달구지. 스쳐가는 차는 적었으나 가끔 짐칸에 사람을 가득 실은 트럭을 볼 수 있었다. 30년 전 텔레비전에서 본 중국의 풍경이 떠오른다. 옷차림도 평양과는 너무나 달랐다. 북한과 무역을 하던 한 재일조선인 선배가 "지방 사람에게 평양은 마치 외국 같다. 평생 한번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꿈의 별세계"라고 가르쳐주셨던 말이 생각났다.

마침 수확기였다. 벼 이삭, 딱딱해 보이는 옥수수 알갱이가 촘촘히 익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을 보아도 굶주리는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던 1990년대 후반에 비하면 식량 사정은 어느 정도 개선된 것 같다. 논가에는 자전거가 나란히 서 있었고, 많은 사람이 손으로 수확에 몰두하고 있었다.

청진에서 전철이 대낮에 철로 위에서 멈춘 모습을 봤다

지방에 가면 숯을 연료로 달리는 차량도 보였고, 노면 전철은 낮에 운휴하고 있기도 했다. 연료 사정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평양을 빠져나가면 오직 몇십년 전 시대 같은 농촌 풍경만 펼쳐지는 북한. 그런데 연일 신문과 TV의 국제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핵을 쥔 몬스터 북한. 이 차이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농촌 풍경과 함께 마주친 대부분의 사람이 평생 보지 못할 것 같은 평양의 마천루, 그리고 이 나라의 어딘가에 있는, 우리가 접근조차 못하는 핵무기 개발 시설. 넉넉지 못한 나라의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고 있는 이 두 곳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농촌 풍경의 낙차는 무엇일까.

성묘에 나선 유가족의 체험도 모두 슬픈 이야기였고 국교가 없다는 이유로 70년 가까이 방문도 못했다. 왜 이럴까. 머무는 동안 분노인지 무엇인지 모르는 감각에 계속 사로잡혀 있었다.

[9월 17일]

회령에서 더 남쪽으로 도로를 2시간 달려, 항구 도시 청진에 도착했다. 일제시대 때는 제철소 등 공업이 번성했고 10만 여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공업 도시이다.

고말산이라는 청진 항구를 내다볼 수 있는 작은 산이 있다. 여기는 일제시대 때는 신사였고, 소련이 침공한 직후엔 전쟁터가 되기도 했고, 지금은 소련의 전승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었다는 한 유족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다.

해안선에는 전선이 쳐 있다. "전기 주의"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만졌지만 전기는 흐르지 않았다.

[9월 18일]

걱정했던 따뜻한 물도 제대로 나왔고 (불운하게도 두 밤 연속 목욕을 못한 기자도 있었지만) 청진을 출발했다.

일본에서 온 유족 5명 중 4명이 청진 출신이었다. 그들이 살던 지역을 찾았다. 그들 중에는 그 시절의 기억이 없는 사람도 있었으나 "여기는 확실히 나의 고향. 바람도 꽃도 딱 이것이다"라고 말했다. 머리 속에서 어린 시절의 가난했던 일본이 되살아났던 것일까. 하여튼 70, 80대 노인들은 활기에 꽉 차 있었다. 온종일 험한 길을 달리면서 겨우겨우 숨쉬고 있는 기자들과 대조적으로, 노인들은 잘 웃고 잘 달리고 술도 잘 마셨다.

이 "천마초등학교" 벽돌 건물은 일제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연구소로 쓰이고 있다.

(계속)

더 많은 사진을 아래서 볼 수 있다.

Photo gallery 북한을 간다 / 평양-회령-청진(2014년9월) Se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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