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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18일 06시 28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19일 14시 12분 KST

시민적 정체성과 전문가적 정체성

"동성애는 치료받아야 할 질병이다." 어떤 의학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주장은 의학자의 과학적 견해일까요? 아니면 직업이 의학자인 시민의 개인적 의견일까요? 동성애와 관련한 정신의학적 논점을 이해하고 어떤 논리적 과정을 거쳐 그런 주장이 나왔는지 살펴봐야만, 판별이 가능할 것입니다.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는 동성애가 판단력, 안정성, 신뢰성, 직업 능력 등의 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동성애를 정신과 진단명에서 삭제하기로 하였습니다. 44년 전 일입니다. 일부 동성애 반대 단체가 논란을 이어가자, 2016년 3월엔 세계정신의학회가 다시 성명을 발표해 동성애가 질병이 아님을 거듭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과학 지식은 보편적이지만, 동시에 잠정적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흘러 성과가 쌓이면 기존 이론이 수정되거나 심지어 폐기되기도 하지요. 동성애 질병설은 폐기된 지 오래입니다. 새로운 증거가 발견돼 다시 설득력을 얻게 될 논리적 가능성마저 배제할 순 없겠지만, 그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동성애가 질병이라는 의학자의 발언은 과학적이라 할 수 없지요. 과학적 견해가 아니면 밝혀선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엔 과학 문제만 있는 게 아닐 테니까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거나 검증될 수 없는 내용을 과학적인 이론인 양 주장하면 곤란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의학자도 시민입니다. 동성애자에 관해 어떤 생각을 품든 그게 성소수자 차별의 근거만 되지 않는다면, 동료 시민으로서 제가 뭐라 할 순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자신이 어떤 자격으로 그렇게 판단하는지는 스스로 분명히 정리할 필요가 있으리라 여깁니다. 자기 견해가 과학 공동체의 엄정한 검증을 거친 과학적 주장이 아니라 믿음의 산물이라면, 거기에 과학의 권위를 얹어선 안 될 테니 말입니다. 이처럼 시민적 정체성과 전문가적 정체성을 분리하는 문제는 사실 과학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 '제이티비시'(JTBC) 기자가 정유라씨의 소재를 경찰에 알리고 체포 장면을 취재한 바 있습니다. 논란이 일었습니다. 기자가 개입해 상황을 바꾸고, 또 그렇게 해서 달라진 상황을 계속 취재했기 때문입니다. 체포 과정을 방송하려는 목적으로 기자가 경찰에게 연락했다는 비판은 아닙니다. 그는 시민적 양심에 따라 행동했으니까요. 다만, 그 과정에서 시민과 기자의 정체성이 서로 충돌할 수 있었다는 게 논점이었습니다.

훌륭한 방송사의 기자가 선의로 좋은 일을 했으니 괜찮다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럼 극우 언론사의 기자가 수배 중인 해고 노동자를 뒤쫓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경찰에 알리는 경우는 어떤가요? 기자의 가치관이 판단의 기준일까요? 간단치 않습니다. 시민으로서 신고하고 기자로서 취재한 제이티비시 기자의 선택이 정당했다 하더라도, 제기된 문제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겠다 싶습니다. (참고로 제가 제이티비시 기자였어도 신고는 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이후의 영상을 방송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의 의견을 전문가적 견해처럼 전한 의학자와 시민적 양심에 따라 행동한 기자의 이야기는 언뜻 별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는 부정적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이기까지 하지요. 그렇지만 공통의 교훈도 제공합니다. 전문가적 정체성과 시민적 정체성의 분리를 통해 전문가들이 매 순간 스스로 어떤 자격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지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성찰의 토대지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이해충돌의 문제에 대처하는 데도 보탬이 되리라 여깁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