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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5월 15일 11시 31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5월 15일 14시 12분 KST

익숙해진 패배와 기억의 왜곡

유시민 전 장관이 팟캐스트에서 한 발언이 여기저기서 공유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발언 녹취록을 읽다 보니 걸리는 내용이 있다. 역대 수도권 재보궐 선거에서 현 야권이 이긴 적이 거의 없다는 부분이다. 현 야권도 충분히 수도권 재보선에서 이길 수 있고, 실제로도 여러 차례 이겼다. 유 전 장관이 고의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그를 비난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쓴 이유는, 야권이 패배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심지어 기억까지 왜곡해가며 현재의 계속 지는 처지를 정당화하려는 모습이 개탄스러웠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유시민 전 장관이 팟캐스트에서 한 발언이 여기저기서 공유되고 있다.

우리 당에 '주류의식'을 가진 집단이 없다는 것이(즉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그의 지적은 매우 적절하고 뼈아프게 들어야 할 이야기다.

그런데 그의 발언 녹취록을 읽다 보니 걸리는 내용이 있다.

역대 수도권 재보궐 선거에서 현 야권이 이긴 적이 거의 없다는 부분이다.

소위 말하는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에 특히 수도권 재보선에서는 현재의 야권이 질 가능성이 '되게 높'고, 실제로 이긴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자면 이번 4.29 재보선은 원래 이기기가 거의 불가능한 선거였다는 것이 되고 따라서 책임을 묻는 것도 맞지 않는 것이 된다. 물론 당 지도부가 달랐던 작년 7.30 재보선도 마찬가지다.

유 전 장관의 발언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이렇다.

특히 야권의 패배를 분석할 때, 요즘 특히 진보언론 쪽에서나 보수언론 쪽에서 각각 다른 동기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데...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론'. 한국은 정치지형 자체가 보수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보도가 계속 나왔습니다. 마치 이런 게 없는 것처럼. 그러고 나니까 어떤 식으로 이야길 하냐면,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 '질 수 없는 선거를 졌으니 이놈들이 큰 죄를 지었음이 분명하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거죠. 선거에 나가서 떨어지는 게 죄를 짓는 건 아니잖아요. 낙선한 거지. 저는 이 헌법의 피선거권을 부정하는 논리, 엄연한 현실에서 존재하고 있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부정하는 논리, 이 둘 다 야권을 해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두 가지를 부정하고 하는 어떤 선거 평가도 이것은 정당하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그 전제를 우선 좀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런 거예요. 역대 보궐, 재보궐 선거에서 수도권에서 현 야권이 이긴 적이 거의 없어요. 제가 한 번 이겨본 사람인데. 2003년도에 제가 나갔을 때 투표 3일 전에 여론조사를 마지막으로 했는데. 아주 유명하고 큰 여론조사 회사에 의뢰해서요. 제가 15%를 앞서 있었어요. 근데 실제 투표율이 26%였어요. 얼마나 이겼냐. 5% 이겼습니다.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15% 이상의 지지율 격차가 있을 때 투표율 25% 내외에서 5% 격차가 나는 거예요.

이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투표율이 35% 밑으로 내려오면 야권의 후보가 두 자릿수 이상의 %로 우세하지 않는 한, 져요. 질가능성이 되게 높아요. 기울어진 운동장이에요. 기본적으로.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했는데 못 이겼다고 지탄을 하는 거예요. 저는 이거는 옳지 않다고 보구요.

이 말이 맞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재보선의 공식은 '여당의 무덤'이라는 것이었다.

국민의 정부 후반기인 2001, 2002년 3차례의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은 17석 중 2석을 얻는 데 그쳤고, 참여정부 때는 국회의원 재보선 의석 22곳 중 2003년 4ㆍ24 재보선에서 개혁당과 연합공천해 당선된 유시민 의원(경기 고양 덕양갑)을 제외하고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와서는 총 10차례 치러진 재보선에서 여당인 한나라당은 2차례만 이기고 8차례 패했다.

수도권도 마찬가지다. 2009년 10월 선거 당시 경기 안산상록을에서는 민주당 김영환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를 8%포인트 차이로 크게 이겼다.(투표율 29.3%)

같은 날 수원 장안에서 민주당 이찬열 후보는 역시 한나라당 박찬숙 후보를 6.5%포인트 차이로 크게 제쳤다.(투표율 35.8% - 그 전 해에 있었던 총선 당시 투표율 43.4%보다 7%포인트 이상 낮은 수치인데도 현 야권 후보가 이긴 것이다)

(수원 장안의 경우 마지막 여론조사 당시 한나라당 박찬숙 후보의 지지율은 35.2%, 민주당 이찬열 후보의 지지율은 34%였다. 그러니까 재보선에서 야권의 후보는 여론조사에서 두 자릿수 이상 우세하지 않는 한 진다는 유 전 장관의 말은 틀린 것이다)

2011년에는 한나라당의 텃밭이라는 분당에서 민주당 손학규 후보가 한나라당 강재섭 후보를 2.7%포인트 차이로 이기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다.(투표율 49.1%-이 투표율은 총선 투표율보다 높은 것이다)

말하자면 현 야권도 충분히 수도권 재보선에서 이길 수 있고, 실제로도 여러 차례 이겼다.

유 전 장관이 고의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그를 비난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이번 재보선 선거 결과에 대해서 현재의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을 쓴 이유는, 야권이 패배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심지어 기억까지 왜곡해가며 현재의 계속 지는 처지를 정당화하려는 모습이 개탄스러웠기 때문이다.

성완종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번 4월 재보선을 바라보는 새정치연합 내의 기류는 비관적인 시각 일색이었다. 외부의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당 지도부도 후보 선출 과정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으려는 등 소극적인 모습으로 일관했다. 말하자면 외부 인사를 영입하거나 혹은 거물 정치인을 등장시키는 등의 발상은 애초에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질 경우를 대비해서 가급적 책임을 줄이려는 모습이었다고 본다면 지나친 해석일까.(실제로 현 지도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소위 '비주류' 측도 우리 당 후보 선출이 경선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약간이나마 인정해준다)

물론 지역에서 경선을 통해서 후보를 선출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완종 사건 전까지) 이번 재보선 상황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당 지도부가 적극적으로 그 결과를 바꾸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보려고 노력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그러다가 성완종 사건이 나면서 이제는 야당이 전승을 해도 모자라다는 얘기가 언론에서 나오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뛴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질 것을 예상하고 짠 전략에서 승리가 나오기는 어렵다.

비단 현 지도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년 7.30 재보선 때도 당 지도부로부터 가장 많은 이야기 중의 하나가, "지면 어떻게 할 거냐."라는 말이었다.

결과에 자신이 없고 책임을 회피하려다 보니 결국 광주에 공천신청을 한 사람을 서울에 출마시키고, 서울에 공천신청을 한 사람을 수원에 가라고 하고, 이미 공천신청을 받고 심사까지 했던 광주에서는 갑자기 외부인사를 영입하는 기괴한 공천을 했던 것이다.

작년의 공천파동이나 올해의 소극적인 공천이나 결국 따져보면 근본 원인은 비슷하다. 패배에 따른 상처를 가급적 적게 입으려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단순한 패배주의 외에 또 다른 원인이 있다.

조금 모순되는 것 같지만 야권에는 터무니 없는 '대선 낙관론'이 있다.

도무지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조어 자체는 그럴 듯한 '10년 주기설'이 대표적이다. 보수 정권이 10년 했으니 다음에는 진보 정권이 된다는 것이다. 대선 때가 되면 유권자는 대략 50:50으로 나뉘고, 이명박, 박근혜의 연속된 실정에 질린 사람들이 현재의 야당 쪽으로 조금 더 오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턱도 없는 소리다.

그런 황당무계한 분위기에 쌓여 있다 보니 야권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어드바이스를 하는 사람들은 '가급적 상처를 입지 않고 살아남기'를 권유한다. '보잘 것 없는 재보선 따위에' 정치적 생명을 걸다가 타격을 입어서 야권의 대선 후보가 되는 기회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누가 당 지도부에 들어가든 혁신보다는 몸조심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상대 계파의 공격과 흔들기에서 무사하려는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상황에 맞서지 않는 정치인을 국민들은 절대 선택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된 사람 중에서 적어도 몸조심하면서 당선된 사람은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 맞는 말이다. 야권에 불리한 점은 한둘이 아니다. 여론지형도 불리하다. 작년 재보선 때는 휴가철이라서 투표율이 낮을 것이기 때문에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휴가철이라 지고, 수도권 재보선이라 못 이기고, 여론지형이 나빠서 지고, 그러다 보면 야권은 도대체 언제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 법이고 승부도 이겨본 쪽이 이기는 법이다.

정말 운동장이 기울어서 불리하다면, 어떻게 하면 그걸 고칠 수 있는지 다들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설사 크게 상처를 입을 위험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치적 생명을 걸고 다가오는 승부마다 가진 것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 정치인이 가져야 할 책임윤리가 아닐까.

매번 선거 전에는 온갖 궁리를 다 하다가 지고 나면 "원래 질 수밖에 없는 선거였다."라는 말을 듣는데 정말 신물이 난다. 왜 야당은 수도권 재보선에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잘 하기만 하면 이길 수 있다. 잘 못해서 지는 거다.

나는 정말 지는 게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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