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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4일 10시 23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24일 14시 12분 KST

박근혜 대통령의 뒤끝

놀랍게도 박 대통령은 사사로운 원한을 간직하고 있다가 여야 수뇌부가 국정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 원한을 날카롭게 표출했고, 상대방의 굴복을 받아냈다. 박 대통령의 머릿 속에는 사사로움과 원한이 국정현안보다 더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인가? 이 원내대표를 향한 박 대통령의 공격은 선친 박정희의 제사상에 올릴 선물로 국정국사교과서를 추진하는 것이라는 세간의 의혹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한겨레/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이종걸 원내대표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무 성과 없이 끝난 5자 회동을 파하는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이 원내대표에게 "아까 뵈니까 인상도 좋으시고 말씀도 잘하시는데 예전에 저보고 그년, 이년이라고 하셨잖아요. 근데 오늘처럼 말씀 잘하시면 인기가 더 좋아지고 잘 되실 텐데.... 인물도 훤하시고..., 왜 그때 이년, 그년 이러셨어요? 제가 깜짝 놀랐잖아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당황한 이 원내대표는 "어휴, 그때는, 뭐, 죄송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라고 답했단다.(박 대통령, 이종걸 만나 "저한테 '그년' 하셨죠")

이 원내대표의 '그년' 발언은, 2012년 8월 이 원내대표가 트위터에 올린 글의 한 대목인데, 당시 이 원내대표는 새누리당 안에서 불거진 '공천헌금' 논란에 대해 자신의 트위터에 "그들의 주인은 박근혜 의원인데 그년 서슬이 퍼래서 사과도 하지 않고 얼렁뚱땅..."이라고 쓴 바 있다. 구설수에 오르자 이 원내대표는 '그녀는'의 줄임말이라고 했다가, 조그만 아이폰을 쓰다 오타가 났다고 변명했고, 끝내 "본의 아닌 표현이 욕이 되어 듣기에 불편한 분들이 계셨다면 유감입니다"라는 사과를 했다. 구차한 변명이고 궁색한 사과였다. '그년'발언은 선출직 직업정치인이 공적자리에서 결코 사용해서는 안되는 표현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종걸 원내대표가 2012년 당시 '그년'이라는 부적절한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중요한 건 박 대통령이 이 원내대표의 '그년'발언을 내내 기억하고 있다가 3년 2개월여만에 이 원내대표에게 기어코 사과를 받아냈다는 사실이다. '그년'발언을 듣고 기분이 좋을 여성은 세상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이 해프닝에 불과한 발언을 잊지 않고 있다가 5자 회동처럼 주요한 자리에서 유감의 뜻을 직설적으로 표시하고 팔을 비트는 방식으로 사과를 받았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박 대통령의 행동에서 드는 생각은 우선 대통령이 그렇게 한가한 자리인가 하는 점이다. 대한민국 정도의 볼륨을 지닌 나라의 대통령은 국정과제들과 밀려드는 현안들을 처리하기에도 힘에 벅차다. 알아야 할 것들은 너무 많고, 생각해야 할 것들은 산적했으며, 판단해야 할 것들은 꼬리를 문다. 한 마디로 대통령은 앉으나 서나 국정에 전념하느라 사사로운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위치다.

놀랍게도 박 대통령은 사사로운 원한을 간직하고 있다가 여야 수뇌부가 국정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 원한을 날카롭게 표출했고, 상대방의 굴복을 받아냈다. 박 대통령의 머릿 속에는 사사로움과 원한이 국정현안보다 더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인가? 이 원내대표를 향한 박 대통령의 공격은 선친 박정희의 제사상에 올릴 선물로 국정국사교과서를 추진하는 것이라는 세간의 의혹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박 대통령의 발언이 실망스러운 건 박 대통령의 복수심과 협량함이 새삼 확인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쯤 되는 사람이 야당 정치인이 과거에 한 실언에 대해 내내 앙심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척 실망스럽다. 대통령의 도량이 그것밖에 되지 않나 싶어서다. 그 정도 도량을 가지고 국민통합을 무슨 수로 이루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하기야 감히 박 대통령의 면전에서 유권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러 나왔다"고 일갈했던 이정희 전 대표가 속했던 통합진보당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대한민국이 갈갈이 찢긴 마당에 박 대통령의 복수심과 협량함을 말하는 건 참으로 부질없다. 복수심과 협량함으로 똘똘 뭉친 박 대통령 치하에서 공포에 떨며 보내야 할 남은 2년여의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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