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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29일 06시 45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9월 29일 14시 12분 KST

홍상수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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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어김없이 추석이 왔다. 추석이 오면 홍상수의 영화가 꿈결처럼 찾아온다. 올해도 홍상수는 추석과 함께 우리 곁에 도착했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제목의 영화를 들고. 나는 홍상수의 장편영화를 모두 봤다. 홍상수는 누추하고 시시하고 지루한 우리의 일상을 미화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다. 하지만 홍상수가 우리의 비루한 일상을 응시하는 방식은 야단스럽거나 날이 서 있진 않다.

물론 초기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강원도의 힘' 같은 작품들은 관객의 마음을 한 없이 불편하게 만들고, 숨 막히게 만든다. 예컨대 '강원도의 힘'에 보면 대학강사인 상권(백종학 분)과 교수인 재완(전재현 분)이 단란주점 여종업원들과 성매매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성매매의 과정은 전혀 선정적이지 않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는 것 같은 건조함이 묻어날 뿐이다. 후배지만 먼저 교수가 된 재완이 외모가 더 나은 여성을 취하는데, 돈은 상권이 내는 것 같다. 둘 사이의 권력 관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묘사다. 무미건조한 성교가 끝난 후 상권의 파트너는 상권이 가져온 영문서적을 들춘다. 물론 그녀에게 독해는 불가능하다. 아연해하던 그녀의 표정이라니.

홍상수는 위선과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우리의 일상을 우리들의 눈 앞에 현시해 우리를 각성케한다. 보기에 따라 홍상수의 영화들이 비슷하게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도 무한반복되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홍상수 월드가 동어반복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홍상수의 영화는 일상에 존재하는 차이를 포착한다. 그리고 그 차이를 영화에 포섭한다. 홍상수가 일상을 다루는 방식은 영화마다 다르다. 매번 홍상수의 영화를 기대하는 건 그 때문이다. 홍상수는 점점 넓어지고, 풍성해지고, 따듯해진다.

홍상수의 영화 중 내가 정말 재미있게 본 작품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과 '하하하(2009)'였다. 이제 한 편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이 영화는 일상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쾌한 방식으로 다룬다.

수원에 내려온 영화감독 함춘수(정재영 분)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림만 그리는 윤희정(김민희 분)을 우연히 화성행궁에서 만나 보낸 이틀 동안의 얘기가 이 영화의 소재다. 호감을 느낀 두 남녀(만약 함춘수가 나름 유명한 예술영화 감독이 아니었더라면, 윤희정이 한눈에 반할 만한 미인이 아니었더라면 이들이 그토록 짧은 시간동안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설정 또한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는 것이 옳을 것이다)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함춘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둘 사이에 미치는 영향을, 동일한 말들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한 사람이 누구에겐 그토록 대단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시시할 수도 있다는 걸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담담히 소개한다.

1부와 2부로 구성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함춘수가 유부남임을 밝히는 시점을 기준으로 많은 것이 바뀐다. 함춘수가 유부남임을 윤희정과 단 둘이 한 술자리에서 밝힌 2부가 1부 보다 해피엔딩에 가깝다. 이 영화에는 너무나 웃겨 웃음을 참기 힘든 장면들이 곳곳에 있다. 그 중 압권은 2부에서 함춘수가 윤희정에게 유부남임을 밝힌 후 윤희정이 '좀 섭섭하다'고 하자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철철 흘리며 너스레를 떠는 장면이다. 정말 여기서 보인 정재영의 연기는 정재영의 연기 인생 가운데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윤희정을 집 앞까지 바래다 주고 곧 다시 나오겠다는 윤희정을 기다리며 엄동에 동태가 된 함춘수를 보자 애틋한 웃음이 터졌다. 한국영화사상 내가 기억하는 가장 슬픈 장면은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2002)에 등장한다. 주인공 경수(김상경 분)는 선영(추상미 분)의 집 문 앞에서 곧 나오겠다며 집 안으로 들어간 선영을 기다린다. 하지만 경수의 불우하기 짝이 없는 사주풀이와 엄청나게 좋은 남편의 사주풀이를 들은 선영은 나오지 않고, 하염없이 선영을 기다리던 경수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선영의 집 앞을 쓸쓸히 떠난다. 함춘수는 경수의 데자뷰처럼 보이지만, 다음날 희정을 함춘수가 만나기에 슬프지만은 않다.

함춘수와 윤희정은 선을 넘지 않고, 함춘수는 영원히 봉인될 로맨스를, 윤희정은 함춘수의 영화를 각각 얻는다. 홍상수는 우리가 시시하고 형편없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홍상수의 영화들에는 각성과 위안이 사이좋게 동거한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역시 그러하다. 깊어가는 가을 우울과 슬픔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보라. 당신에게 기쁨과 위로를 줄 것이다. 비록 그 기쁨과 위로가 찰나에 불과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 찰나의 힘으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사족 : 나는 수원에 살고 화성행궁도 방문했지만, 홍상수가 그린 수원은 아득히 먼 외국의 처음 본 도시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