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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10일 10시 25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9월 10일 14시 12분 KST

북한이 세계 제일의 반미국가가 된 이유 ​

김태우 교수가 쓴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을 읽었다. 김 교수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와 미공군역사연구실(AFHRA)에서 입수한 미공군 문서, 한국전쟁 당시의 소련, 중국, 남북한 문서 등을 토대로 한국전쟁 시기 미공군의 활동상을 서술한 기념비적 저술을 남겼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휴전협정이 발효되기 직전까지 미공군은 제공권 장악,북한 내 군사시설·산업시설 등에 대한 전략폭격, 병참 및 보급선에 대한 폭격, 지상군에 대한 화력지원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미공군을 빼놓고 한국전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김 교수에 따르면 한국전쟁 시기 미공군의 폭격전략은 정밀폭격-초토화폭격-항공압력전략으로 변화된다. 정밀폭격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중공군이 대거 개입한 이후 맥아더가 11월 5일 초토화폭격을 공식천명하기까지의 기간 동안 유지됐는데, 말이 좋아 정밀폭격이지 북한은 물론 남한 내 북한 점령지역에 대해 불의 세례를 퍼부은 폭격전략이었다. 단 민간인 거주지역을 폭격목표로 삼지는 않았다는 점, 2차 대전 당시 드레스덴과 도쿄를 불바다로 만든 소이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중공군의 전면 개입으로 전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면서 도입된 초토화폭격 이후엔 미공군이 소이탄을 사용해 북한전역을 황무지로 만든다. 북한의 거의 모든 도시들은 화염폭풍 속에 잿더미로 변했다. 심지어 작은 촌락이나 고립된 시골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북한 전역을 석기시대로 돌려놓을 듯한 초토화폭격이 진행된 것이다.

정전협정이 진행 중이던 1952년 7월 이후 미공군이 사용한 항공압력전략은 북한의 철도, 수력발전소, 저수지 등을 표적으로 했다. 정전협정을 유리하게 체결하기 위해 북한을 사지로 몰아넣으려는 전략이 바로 항공압력전략이었다. 전폭기와 전투기의 눈에 띄는 민간인들도 전부 표적이 되어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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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성진제철소의 폭격 전후 모습. (창비)

특기할 점은 미공군의 폭격이 북한지역이나 북한인민에게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공군은 남한 내 북한 점령지역의 군사적, 산업적 목표와 흰옷 입은 피난민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했다. 미공군은 피아를 식별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세계에서 반미감정이 가장 강한 북한인민들의 집단적 멘털리티의 일단이 한국전쟁 시기 미공군의 폭격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김 교수의 관점은 타당해 보인다. 무고한 북한 주민 입장에서 아무런 군사적, 산업적 가치가 없는 촌락에 미공군 전폭기가 소이탄을 투하해 전 재산을 잃고 사랑하는 가족이 불에 타 죽는 광경을 봤다면 죽을 때까지 결코 미국을 용서하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주민을 상대로 한 건 아니지만, 아래 인용한 사건들을 읽고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

1950년 9월 10일 인천 월미도에서 발생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 그 대표적 예다...생존자들의 여러 증언은 당시 조종사들이 확인할 수 없었던 민간인 희생의 처참한 광경을 매우 생생하게 들려준다. 예컨대 사건 목격자인 임ㅇㅇ는 옆집에 살던 10대 고아 삼남매가 전쟁기에 노역 등을 하며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사방에 불이 붙자 꼭 껴안고 함께 타 죽었다고 증언한다.- 262페이지

『뉴욕타임즈』의 종군기자 베럿(G. Barrett)은 1951년 경기도 안양 부근의 어느 농촌 마을을 방문한 후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작성했다.

중국군이 마을을 점령하기 3~4일 전에 마을에 대한 네이팜탄 공격이 진행되었다. 마을 어느 곳에서도 시체가 매장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를 행할 사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1명의 늙은 여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곳에 생존한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 4명의 시신으로 가득 찬 검게 그을린 마당 안에서 몇 벌의 옷을 부여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 전체와 들판에서 발견되고 사살되었다. 그들은 네이팜탄 공격을 당했을 때 취했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남성은 막 자전거를 타려는 참이었고, 50명의 소년과 소녀들은 고아원에서 뛰놀고 있었으며, 한 가정주부는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없었다. (...) 약 200구의 시체들이 그 작은 마을에 놓여 있었다. - 33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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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미 공군의 B-26 경폭격기가 전북 이리조차장을 폭격하고 있다. (창비)

에드거 스노우가 일본군의 충칭 폭격 현장을 본 후 한 아래의 말을 읽으면 폭격 피해자들의 트라우마가 절대로 치유될 수 없는 것이란 걸 알게 된다.

공습은 자기 아들의 떨어진 머리를 찾고 있는 어머니를 본 적이 없거나, 불에 타버린 학생들의 고약한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진실로 이해할 수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를 일으킨다.

미공군의 폭격이 북한인민들에게 남긴 집단적 상처는 너무나 깊고 컸다. 미공군의 폭격으로 북한인민들은 가족을 잃고, 재산을 잃고, 일상을 잃었다. 북한인민들이 겪은 집단적 기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켰으니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한다면 논의가 진척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북 간의 관계 정상화 없는 남북 간의 관계개선의 한계가 명백하다고 전제할 때 북한인민들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원한의 실체를 이해하는 건 중요하다. 미북 간 관계개선의 실마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금이라도 미국이 한국전쟁 시기 진행된 북폭에 대해 '과도했고 무고한 피해를 입은 민간인들이 있었다. 무고한 희생을 겪은 민간인들에게 사과한다'는 정도의 사실인정과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한다면 어떨까 싶다. 아마 미국에 대한 북한인민들의 응어리가 상당히 누그러지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한국전쟁 시기 진행된 미공군의 공중폭격에 대해 복기해야 하는 것은 여전히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상태가 진행되는 까닭이다. 한반도의 군사적 대결구도를 종식시키고 평화체제로 전환시켜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폭격은 과거완료형 사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