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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9일 06시 25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12월 30일 14시 12분 KST

사라진 청춘, 다가오는 늙음

pregnant

올 해가 가기 전에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 영화는 현실의 핍진함과 늙어가는 것의 추레함에 대해, 바위처럼 무거운 삶과 깃털 보다 가벼운 죽음에 대해 에둘러가지 않고 직격한다. 여공(女工)으로, 기지촌 여성으로 신산스런 생을 이어 온 소영(윤여정 분)은 노인이 되고도 생계를 위해 매춘을 한다. 탑골 공원 등이 그녀의 일터다. 세상은 소영을 '박카스 아줌마'라고 부른다.

소영은 늙었지만 성욕은 아직 죽지 않은 남성 노인들의 성욕을 해소해 주는 댓가로 돈을 받는다. 육체는 급격히 시들지만, 성욕은 육체가 시드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런 속도의 차이는 슬프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으로서의 에로티즘(!)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살지만,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선(소영은 삶이 치욕이고 지옥인 남자들의 자살을 돕고, 길에서 헤매는 코피노 소년을 집에 데려와 돌보며, 장애인과 성전환자를 차별 없이 대한다)을 행하는 소영은, 그러나 끝내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하고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주검을 수습할 사람조차 없기에 그녀는 무연고자라는 표지를 달고 유골로 남는다.

〈죽여주는 여자〉를 읽는 관점과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내게 〈죽여주는 여자〉는 늙음과 죽음에 대한 영화다. ​청년이 노년이나 죽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건 어렵다. 청년은 젊음이 항상 자기 곁에 머물거라고 여긴다. 노화가, 더 나아가 죽음이 자기를 방문할 거라고 절감하는 청년은 없거나 드물다. 노년의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젊음의 시기를 거쳤다. 늙음과 죽음이 그렇듯 젊음도 공평하게 사람들을 찾아간다.

분명 나에게도 스무 살의 젊은 날이 있었다. 청춘의 시간들은 더디게 와서, 쏜살 같이 사라졌다. 중년의 나에게 청춘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거울을 보면 늙어가는 사내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 이십년 아니 십년 전의 나는〈죽여주는 여자〉를 외면했을 것이다. 이 나이에 본 〈죽여주는 여자〉는 가슴을 찢는다. 달아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늙음과 죽음에 얼굴을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대하는 것이 인간적 존엄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젊음과 생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애호가 인간을 괴물로 만든다고 생각하는 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