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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4일 11시 01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24일 14시 12분 KST

소시지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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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최근 1군(群) 발암물질로 낙인 찍혀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된 난 소시지(sausage)입니다. 기원전 5000년께 현재 이라크 지역에서 살던 수메르 인이 처음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음식 중 하나예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금식령(禁食令)을 내린 이후 사상 최대 위기를 21세기에 맞고 있어요.

나를 발암물질 1군에 포함시킨 곳은 세계보건기구(WHO) 산하의 국제암연구소(IARC)예요. 여기선 지난 40여년 간 약 900가지 물질에 대한 발암성 평가가 이뤄졌어요. 이중 100여 가지가 1군 발암물질로 지정됐고요. IARC 외에도 발암성 평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기관은 미국 국립독성프로그램(NTP)과 환경보호청(EPA) 등 두 곳이 더 있어요. 아직 이곳에선 가공육ㆍ적색육에 대해 발암 '꼬리표'를 붙이지 않았어요.

내가 1군 발암물질이라고 하니까 마트에서 날 집어 들기가 꺼림칙하시죠?

IARC의 1군 발암물질이 동물실험은 물론 사람 대상 역학(疫學) 연구 등을 통해 인간에게 암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증명된 물질임은 부인할 수 없어요. 그러나 1군 발암물질에 노출됐다고 해서 바로 암이 걸리게 되는 것은 아녜요.

요즘 주변에서 "나나 담배나 둘 다 1군 발암물질이므로 결국 내가 담배만큼 위험(risk)한 것이냐"는 질문을 흔히 들어요. 이런 비교는 정말 억울합니다. 예로 술과 B형 간염은 모두 간암을 일으키는 것이 증명된 1군 발암물질이지만 간암을 일으키는 능력(위험도)에 있어선 B형 간염과 술이 동급(同級)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IARC의 발표대로라면 나를 매일 50g씩 추가로 평생 먹을 때마다 대장암 발생률이 18%씩 상승해요. 담배는 하루 15개비씩 추가로 피울 때마다 암 발생률이 거의 500%씩 증가하므로 나와 담배의 암 유발 능력은 천양지차예요. 오히려 흡연이 나와 같은 1군 발암물질이란 구실로, 담배를 다시 무는 사람이 늘어날까 걱정이에요.

내 재료가 되는 돼지고기를 비롯해 쇠고기ㆍ양고기ㆍ염소고기 등 적색육(赤色肉)은 이번에 IARC로부터 2A군 발암가능 물질 판정을 받았어요. IARC의 2군 발암가능물질은 다시 A와 B로 나뉘는데 발암성 관련 증거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축적된 것이 2A군입니다.

사람들이 고기를 섭취하는 방법은 크게 보아 둘뿐이죠. 적색육 등 생고기로 즐기거나 나 같은 가공육을 만들어뒀다가 먹는 것이죠. 이번에 IARC는 가공육ㆍ적색육이 모두 발암성과 관련 있다고 평가했으므로 육식(肉食) 문화 전반에 대해 '과하지 말라'는 경종을 울린 셈입니다.

그렇다고 가공육ㆍ적색육 섭취를 무조건 금하란 의미가 아니며 이 점은 WHO도 인정하고 있어요.

적당량을 섭취하면 고기는 양질의 단백질ㆍ철분ㆍ칼슘ㆍ마그네슘ㆍ비타민 B군ㆍ비타민 D 등 여러 영양소를 공급받을 수 있는 고마운 먹거리입니다. 키도 키워주고요. 문제는 어느 정도가 적량인가이지요. IARC가 이번에 예로 든 하루 가공육 50g, 적색육 100g이 '적정량'이라고 볼 만한 과학적 근거는 없습니다. 나라마다 선호하는 가공육의 종류, 고기 먹는 습관, 고기 조리법, 육류 섭취량 등이 다 다르므로 각국이 알아서 적정량을 산출하란 것입니다. 고기를 먹을 때 상추ㆍ깻잎 등 쌈채소를 곁들이는 한국인의 식문화도 암 예방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여겨져요. 가공육ㆍ적색육으로 인한 암 발생 위험을 낮추기 위해선 우유 등 칼슘을 충분히 섭취하는 것도 중요해요.

"모든 독성은 양(量)에서 나온다"는 것이 독성학의 기본 명제예요. 가공육ㆍ적색육도 적정량 섭취가 최선의 대책입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한국인의 가공육ㆍ적색육 섭취 권장량을 신속하게 정해 소비자에게 알려줄 것을 기대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