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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19일 05시 47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5월 19일 14시 12분 KST

장정일은 지제크를 물구나무 세웠다

지제크는 테러를 당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정일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적한 오해의 문제가 명확하지 않은 번역 탓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맥을 따져보면 충분히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들마저도 이미 수립된 자신의 의견에 맞춰 임의로 갖다 붙인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논란이 되는 사안일수록 자신의 편견을 넘어 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신중한 태도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겨레

이 글은 최근 출간된 슬라보이 지제크의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원제: 이슬람과 모더니티)에 대한 장정일의 서평 때문에 쓰게 되었다. 그의 서평이 책의 내용을 '거꾸로' 전달하고 있어서 마치 지제크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직후 등장했던 "나는 샤를리다"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장정일의 서평은 평소 자신이 해오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제크의 책을 자의적으로 인용함으로써 '확증편향'의 오류를 그대로 보여줬다는 생각이다.

지제크의 책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에 대해 <뉴스테이츠맨>과 <런던서평지> 등에 발표한 일련의 기고문을 묶어서 책으로 출간한 것으로 한국어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도 내용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지제크의 주장을 다르게 소개하고 있는 장정일의 서평을 접했을 때,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장정일은 지제크의 주장을 "샤를리 에브도에서 벌어진 살인을 분명하게 정죄해야 한다. 은밀하게 경고하듯이 정죄해서도 안 된다"로 요약하면서 지제크가 "이번 사건에 대해 도착적인 논변을 편 좌파 지식인들과 본인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고 말한다.

장정일이 여기에서 상정하고 있는 "도착적인 논변을 편 좌파 지식인들"은 흥미롭게도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을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맥락에서 살펴야한다고 말했던 '한국 지식인들'을 암시한다. 이번 테러 사건이 얹혀 있는 복잡한 정치적 구조를 고찰하자는 주장을 장정일은 "판에 박은 레퍼토리"이며 "도착적인 논변"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망설임 없이 그는 지제크가 비판하고 있는 '자유주의 좌파'를 샤를리 에브도 테러의 희생자들을 향해 "'인과응보'라는 막말을 쏟아내는 좌파 지식인들"과 동일시한다. 장정일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이 정체불명의 '좌파 지식인들'은 "이슬람과 같은 입장"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할 '가짜 좌파들'이다. 그러나 이런 전제는 지제크의 의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일 뿐만 아니라, 장정일이 지제크를 무단으로 차용해서 비판하는 그 '한국 좌파 지식인들'의 주장에도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유럽의 정치지형도가 한국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유럽에서 좌파진영으로 분류되는 세력은 사민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한국처럼 '자유주의 좌파'가 좌파진영을 대거 점거하고 있는 형세와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조건에서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제크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의 책임을 물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제크가 이 책에서 맥락상 '자유주의 좌파'라고 부르는 세력은 프랑스 대통령 올랑드와 독일 수상 메르켈로 대표되는 사민주의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메르켈은 테러 사건 이전에 샤를리 에브도가 불필요하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자극한다고 수차례 경고했다. 이 책의 서두에서 지제크가 정치인들과 경찰까지 대거 동참한 파리 집회를 풍자하고 있다는 것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월 11일 백만 명이 운집한 이 집회에서 외쳐진 구호가 바로 테러 반대와 관용이었다. 지제크는 "나는 경찰이다"는 구호까지 등장한 파리 집회의 '기이한 풍경'을 이데올로기의 환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출판사 소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책에서 지제크는 시종일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에 대립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립은 결국 가짜 대립이며, 두 세력은 상대를 전제하면서 서로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그의 목적은 문명이라는 가면에 가려져 있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까발리고, 이슬람 근본주의를 만들어낸 원인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체제라는 사실을 논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정일은 이런 주장을 면밀히 따라가기보다 자신의 내부에 도사린 성급한 추단을 지제크의 생각에 기대어 정당화하기에 바쁘다. 여기에서부터 이미 아귀가 맞지 않기 시작한다.

사정이 이러니, 뒤에 따르는 주장이 물구나무를 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인용한 내용을 보자. "맥락을 고려하자는 사람들은 말한다. 샤를리 에브도를 공격한 형제들은 미국이 이라크에 주둔한 것이 너무 끔찍해서 놀랐다고 한다. (맞다. 하지만 그 형제들은 프랑스 풍자 잡지 대신 미군의 군사시설을 공격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이슬람인은 사실상 서구에서 가장 착취당하고 대접받지 못한 소수라고 한다. (맞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흑인은 훨씬 더 심하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을 하거나 폭탄을 던지지 않는다.)" 이 구절들은 지제크가 개진하고 있는 전체 논의의 맥락과 전혀 상관없이 인용되어 있다.

지제크는 파리 집회를 "국민과 군대가 하나 되는 환상적 장면"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이데올로기가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지제크는 특유의 풍자를 사용해서 모순적인 가치를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보여준다. 지제크의 용어법에서 이데올로기는 겉으로 완벽하게 보이지만 끊임없이 서로 충돌하는 개별 환상에 의해 무너지는 모순적 체계이다. 이런 자신의 정의에 입각해서 지제크는 "이 환상적인 현재성이 잠깐 동안 모든 적대들을 없애버렸다"고 진술한다. 이어서 그는 "그것들이 일부러 애매하게 만들어버린 것은 무엇인가"고 묻는다. 물론 한국어판에서 이 부분은 다소 명확하지 않게 번역되어 있다. 원문에서 "그것들"(they)은 파리 집회에서 목격했던 "열광적인 순간들"(the ecstatic moments)을 의미한다. 이 문장의 주어가 한국어판에 나오는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 다음 문장에서 등장하는 "그것들의 기능"(their function)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질문 다음에 장정일이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한다고 착각한 문제의 문장이 등장한다. 원문에서 지제크는 "물론 우리는 샤를리 에브도에서 벌어진 살인을 분명하게 정죄해야한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유지시키는 근간을 공격하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괄호를 치고 "물론 샤를리 에브도는 은밀하게 비꼰다고 했지만 지나치게 화를 돋우었고 이슬람교를 무시했다"(『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 13쪽)고 해놓았다. 장정일은 이 문장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그 다음 문장들부터 인용하고 있다. 앞의 문장은 장정일이 주장하는 지제크가 '좌파 지식인'의 '판에 박은 레퍼토리'를 공박한다는 진술과 맥락이 맞지 않다. 왜 이런 모순이 발생했을까. 파리 집회에서 드러난 이데올로기적 통합이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폭로하기 위해 괄호가 사용되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평소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는 내용만을 편집했기 때문이다. 개그를 다큐로 착각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장정일은 파리 집회에 내재한 모순을 지적하기 위해 수사학적으로 지제크가 사용한 괄호에 대해, "지제크는 맥락을 고려하자는 사람들, 곧 쿠아시 형제에게 온정적인 좌파 지식인들에 대한 공박을 모두 괄호 처리했다"고 주장하면서, "괄호는 종종 '이런 것까지 가르쳐 줘야 해?'라는 가외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형식"이라고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다. 당연히 문맥을 따져보면, 지제크가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맥락을 고려하자는 사람들"은 파리 집회에 모여서 테러 반대와 관용을 동시에 주장했던 이들을 의미한다. 지제크가 굳이 괄호까지 쳐서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자 했다면 그 대상은 파리 집회에 모여서 "나는 샤를리다"를 외쳤던 이들이다. 지제크는 이들에게 자유주의의 가치를 지키려고 한다면, 이슬람 근본주의를 이해할 수 없는 자유주의적 입장을 버리고 자신들보다 더 급진적인 좌파,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연대해야한다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지제크의 논지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장정일은 자신의 글에서 계속 '자유주의 좌파'와 '마르크스주의 좌파'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주의 좌파'와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사실상 가짜 좌파이고 가짜 근본주의자이기 때문에 서로 상생관계에 있다는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서구에 대해 열등감을 느낀다는 지제크의 분석은, 장정일의 추측과 달리, 관용에 입각해서 서구가 "우리를 성인 취급 해달라"는 주장이 아니다. 지제크는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실제로 근본주의적이지 않고 서구를 닮으려고 하기에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제크는 여기에서 불교신도의 사례를 들면서 진정한 불교 근본주의자라면 서구의 쾌락주의자를 만났을 때, 열등감 따위를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근본주의야말로 절대적으로 위대하고 우월하다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서구에 대해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진정으로 근본주의를 실천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서구와 경쟁해서 이길 생각에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하이에크와 쿠틉을 비교하면서 알라와 신은 모두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지제크가 말하는 것도 이런 사실을 논증하기 위함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는 쿠틉의 주장에서 시장을 절대화하는 하이에크와 같은 논리를 발견하는 것은 두 주장에 상당한 논리적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들은 근본주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수정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점에서도 서로 닮아 있다.

물론 지제크가 자유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제크가 볼 때, 이슬람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에 내재한 결함 때문에 발생한 파시즘적인 반응이다. 이 결함을 해소하는 방법은 자유주의 가치의 보편주의를 더 급진적인 좌파의 관점에서 전유하는 것이다. 지제크는 자유주의 가치 자체가 모든 문화에 유효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가 절대시하는 그 개인이 특수한 사회적 위치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차원에 직접 참여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이렇게 사회적 위치가 특수하게 부여하는 '밥 그릇 싸움'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인 차원으로 도약하는 개인이야말로 지제크가 지속적으로 옹호해온 '사건적 주체'이다. 물론 이런 주장을 지제크만이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야말로 그가 이 책을 쓴 결정적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정일은 이런 사실을 뒤로 한 채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내릴 수 있는 결론으로 직행해버린다. 지제크가 단순히 "이것만으로는 테러를 당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하기 위해 후반부에서 길게 이슬람의 논리를 분석하고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지제크는 테러를 당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정일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적한 오해의 문제가 명확하지 않은 번역 탓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맥을 따져보면 충분히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들마저도 이미 수립된 자신의 의견에 맞춰 임의로 갖다 붙인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논란이 되는 사안일수록 자신의 편견을 넘어 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신중한 태도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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