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4년 07월 23일 11시 50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9월 22일 14시 12분 KST

쉬농의 바람

차분해진 마음으로 찬찬히 성을 내려와 내가 좋아하는 플라타나스 숲길로 발을 옮긴다. 사람도 없는 이 흙길을 타박타박 걸으면 허리가 곧추 세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며 생각이 정리되는 듯하니 역시 환경은 무시할 수 없는가 보다. 30여m 키 큰 플라타나스가 양옆으로 죽 늘어서 하늘을 향해 잎들을 부딪치고 오른편으로 흐르는, 시냇물보다 조금 큰 비엔느 강에 쏟아지는 햇빛이 반짝반짝 무어라고 자꾸 신호를 주는 것만 같아, 귀와 눈이 더 깊이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 인다.

2014-07-22-.jpg


쉬농의 바람     Le Vent de Chinon

쉬농의 바람 소리는 유다르다

고요 속에 6세기 전 함성이 들려온다

프랑스의 쉬농과 인연이 된 것은 피터 현 선생과의 인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국 분 중 아마도 가장 global mind 를 지닌 그는 1949년에 미국 유학을 갔고 1950년 대 초 미국에 한창 매카시즘이 번질 때 함흥서 온 공산주의자로 몰려 국외로 추방되어 겨우겨우 스페인을 거쳐 프랑스로 가게 되었고 산전수전 고생을 거쳐 뉴욕과 프랑스, 서울에서 신문사와 출판사에서 성공적으로 글을 쓰게 된다

싱가포르에서 펀드 회사를 하는 아들이 프랑스의 크리세에 16세기 성 Chateau를 샀고 일찍이 프랑스에 있었던 현선생이 봄 여름이면 거기서 지내는데 그 바로 옆이 쉬농이었다

그 지역 루아르 밸리는 기름진 옥토에 강물이 휘돌고 풍광이 좋아 파리 이전 중세의 수도였고 프랑스 왕가와 사돈을 맺어 이 땅을 탐내던 영국과 백년 전쟁까지 치루었는데 여러 작은 마을들이 중세 피렌체의 영향인 듯 르네상스 풍의 건축과 아름다운 성이 유난히 많다

크리세는 인구 102명, 이슬렛, 싸쉐 등 다른 마을들도 옹기종기 작은데 쉬농은 그에 비해서는 큰 편으로 뮤제 갤러리 레스토랑 앤틱 숍 책방 등 골목골목이 정취가 있어 마치 타임 켑슐을 타고 다른 세상 속에 들어와 있는 듯 하다

2008년 쉬농에 하나 뿐인 작은 호텔에 묵었는데 이층 방 창으로 내다보이던 언덕 위 쉬농성이 꿈 같았고 밤에 그 위로 달이 뜨면 노란 빛의 성이 신비로웠다

서울에서 오면 보통 파리나 니스 같은 대도시를 보고 이런 작은 시골들을 못 보고 가는 게 아쉽다

현선생 여름 집에 이번에 엿새를 머물었다

아침마다 파리에서 찍는 뉴욕타임스를 사러 20분 달려 쉬농엘 나오면 달리는 시골 길도 꽃핀 들판과 커다란 하늘이 좋지만 7천명 인구의 쉬농 시내는 사람 냄새가 나 좋았다

규모가 작으나 쉬농성은 1337 - 1453년, 116년에 걸친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끝무렵 잔 다크 Jeanne d'Arc 1412 - 1431가 꿈에 '천사의 계시'를 받아 그 성에서 전투 출정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지긋지긋한 전쟁에 백성은 지쳤고 잉글랜드 군에 비해 프랑스의 왕가나 군은 힘이 형편 없는데 '일어나 프랑스를 구하라'라는 음성을 듣고 간청하는 평범한 소녀의 말을 무시하다 마지막에 들어주었고 백성들의 마음에 희미하던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어 프랑스에 승리를 안기고 조국을 구한다

그 후 잔 다크의 인기가 솟구치자 그 때문에 왕이 된 샤를 7세는 질투로 그를 마녀로 몰아 화형을 당하게 된다. 그의 나이 열 아홉

그 후 잔 다크란 이름은 수백년 세계 어디에서나 여성 영웅의 대명사가 된다

이 쪼끄만 마을에 역사와 함께 길이 갈 그런 소녀 영웅이 등장한 것이다

그 성이 올려다 보이고 반대편 강쪽으로는 쉬농 출신으로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16세기 프랑스 시인 라블레 Francois Rablelais 1483 - 1553 의 동상이 보이는 시내 한가운데 라블레지엔느 (A La Pause Rablelaisiennes 라블레 사람들의 쉼터) 식당 옥외 코너에서 에스프레소를 들며 현선생이 뉴욕타임스로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는 사이, 나는 걸어서 새로 지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쉬농성에 올라가 아래 15세기의 마을과 강과 그 역사를 내려다 본다

그 성을 바라보면 이 무거운 돌을 옮겨다 쌓느라 허리가 휘었을 백성들과 그 오랜 전쟁에서 스러져간 사람들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189년 십자군 전쟁으로 죽어 간 총사령관의 글귀도 성내 벽에 쓰여 있다

'좀 더 가까이 오시오 나는 무덤 저편에서 말하노니

영국왕 헨리 2세가 성 몇 개 더 탈취하려고 우리를 사용했고 이 성에서 그는 죽었으며 내 묘비도 이리로 옮겨졌지만

하늘이시여, 어느 영혼도 내가 그렇게 갔음을 비난하지 말게 하소서'

십자군과 그 3백년 후, 16세 용감한 잔 다크의 고함이 들려오는 듯, 그들은 꿈도 못 꾸었을 21세기 최신식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른 나에게 그 영혼의 이야기를 바람이 들려 준다. 햇살은 눈이 부셨고 이름 모를 짙은 핑크 들꽃이 수 세기 전 그들이 쏟은 피인 듯 성 바위틈에 피어 있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찬찬히 성을 내려와 내가 좋아하는 플라타나스 숲길로 발을 옮긴다

사람도 없는 이 흙길을 타박타박 걸으면 허리가 곧추 세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며 생각이 정리되는 듯하니 역시 환경은 무시할 수 없는가 보다

30여 m 키 큰 플라타나스가 양옆으로 죽 늘어서 하늘을 향해 잎들을 부딪치고 오른 편으로 흐르는, 시냇물보다 조금 큰 비엔느 강에 쏟아지는 햇빛이 반짝반짝 무어라고 자꾸 신호를 주는 것만 같아, 귀와 눈이 더 깊이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 인다

숲에서 반나절 바람 소릴 들어도 좋으련만, 함경도 기질의 선생님이 야단하지 않나 싶어 라블레지엔느로 성급히 뛰어가면 아니나 다를까 버럭 소리를 지르신다

배 나온 독일 주인에게 나를 가르키며 이 사람이 시인인데 오늘 여기서 점심을 하니 이 '라블레지엔느의 쉼터'가 언젠가 '이승신지엔느의 쉼터'로 바뀔지 모른다고 익살스레 귀띔도 한다

어디든 걸어 다니는 이 곳에 프랑스 대표 작가로 발작, 플로베르 등에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 태어남으로 마을이 완성되었고, 전쟁 영웅의 동상은 보이지 않아도 시내 한복판에 시인의 동상은 서 있어 쉬농 주민들의 수준을 말해 준다

선진국이란 시민의 마음이 성숙하고, 전쟁의 영웅이나 부유하게 만들어 준 리더보다 그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시인의 정신을 가슴에 두는 것이 기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쉬농의 아침이다

     비엔느 강을 따라

     플라타나스 긴 숲길을 걸으면


     12세기 십자군의 철갑옷과

     15세기 잔다크의 흰갑옷이

     보이는 듯


     와 와 쉬농을 휘감는 바람에

     거친 함성 들려오고


     9세기 전 神을 위해 싸웠고

     6세기 전 어린 소녀 조국 위해 싸웠는데


     어이 기껏 지난 수 십년과

     오늘 일에 빠져 있나 자성하다

     묵묵히 내 옆을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수 없는 목숨 앗아간 피빛 물빛이

     잎 사이 쏟아지는 햇살에 투명해져

     반짝이는 이야기를 끝없이 쏟네


     천년 전 이랬다고

     천년 후는 이렇다고

     그 사이 틈새 한 세상쯤

     그저 눈 한번 깜짝할 사이라고


     기껏 코앞 21세기를 생각하고

     손등의 가시를 들여다 보다

     30세기 40세기 생각에 정신이 들어


     멀리 앞을 내다 보면

     거기에 억겹 바람은 일고

     햇빛 새삼 눈부시나니


     천년의 시간이 켜켜이 배어든

     쉬농의 숲에


     이 아침

     바람은 또 스치고


호텔 룸 창으로 보이던 언덕 위 쉬농 성 - 2008 7

15세기 마을, 언덕 위 성을 가려면 21세기 엘리베이터를 타야

마을 한가운데 있는 쉬농 출신의 프랑스 유명 시인 '프랑소와 라블레'

A La Pause Rablelaisienne, 아침마다 피터현 선생이 커피 드는 왼쪽 코너

비엔느 강을 따라 흐르는 플라타나스 숲길, 그 바람 - 2014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