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5년 09월 14일 05시 53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9월 14일 14시 12분 KST

어떤 혐오표현을 제한할 것인가

gettyimagesbank

홍성수의 혐오시대유감

1) "Roh는 17세였고 그의 지능지수(IQ)는 69였다. 그는 6세 때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결과 뇌에 결함이 생겨 고통받았다."

2) "잠재적인 범죄자나 다름없는 외국인에 대해 감시와 통제를 강화해도 부족할 판에 다문화 입학전형? 더 이상의 외국인 우대정책은 우리 사회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이 둘 모두 대학교수가 한 발언이라면, 과연 어느 쪽의 해악이 더 클까? 공적 규제가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일까? 1)은 실제 모 대학에서 출제된 시험문제의 일부이고, 2)는 필자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일도양단식으로 ○×를 가리기보다는 과연 어떤 표현이 공적 개입이 필요한 수준의 해악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이유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해악을 측정할 '잣대'가 필요하다

표현의 해악은 신체의 손상이나 재산권 침해 등과 같이 눈에 보이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직접적으로 폭력을 선동하는 것도 아닌, 공동체 가치의 훼손, 민주주의 이념의 파괴, 소수자 차별 선동 등의 해악의 표지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채기조차 쉽지 않다. 이런 추상적 개념들로는 무엇이 해로운지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해악을 측정할 '잣대'를 가져야 한다. 명확하고 합리적이고 일관된 기준 없이 표현 자체를 규제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1)의 발언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심한 조롱이자 모욕이다. 망자에 대해서는 함부로 농을 치지 않는 우리네 정서와도 맞지 않는다. 노무현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존경심과 그의 죽음으로 인한 엄청난 상실감을 생각하면 이런 조롱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갖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 사안은 어디까지나 국가지도자 또는 역사적 인물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무현에 대한 조롱을 규제한다면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대한 모욕도 규제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은 '좋은 대통령'이었고 이승만은 '나쁜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다르게 봐야 한다는 식의 구분법은 정치적 주장으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표현에 대한 규제 근거로서 쓰일 수 있는 기준이 되긴 어렵다. 법을 만들거나 판결을 할 때 활용되긴 어렵다는 것이다.

반면 2)의 발언은 표현상으로 점잖아 보인다. 확신에 차 있지도 않고, 선동조도 아니며, 표현 자체가 심각하게 품위를 잃었거나 모욕적인 것도 아니다. '학문적 의견'의 모양새까지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일견 '점잖은' 발언의 파급력은 상당하다.

일단 이 말은 어떤 특정인을 모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학에 다니는 외국인 학생 일반을 향해 있다. 대학 사회에서 이런 말이 공공연하게 회자된다면 외국인 학생들이 정상적으로 대학을 다니기 어려울 것이다. 즉, 이런 유의 발언은 '개인'이 아니라 '소수자 집단' 전체를 향해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막대하다. 혐오표현의 해악이 확장성·폭력성·지속성 등의 특징을 갖는 이유는 바로 그 대상이 소수자 집단이기 때문이다.

요즘 이자스민 의원에 대한 기사만 올라오면 노골적인 비난 댓글이 줄을 잇곤 한다. 비난은 이자스민 의원을 향하고 있지만, 그것은 주한 외국인 전체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혐오표현은 단 한 명의 개인을 지목하건, 전체 소수자 집단을 일반적으로 지칭하건 간에 소수자 집단 전체에 파급력을 갖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2015-09-11-1441959764-4693164-6001597778_20150914.JPG

외국인 일반을 향한 혐오표현은 '집단' 전체를 향한 것으로 더욱 심각한 일로 여겨진다. 2012년 외국인범죄 척결연대 회원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브리지트 바르도는 왜 처벌을 받았나

프랑스에서 여러 차례 처벌을 받았던 브리지트 바르도의 경우에도 발언 수위 자체는 높지 않았다. "이슬람화에 반대한다" "무슬림들이 프랑스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는 정도를 말했을 뿐, '선동'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바르도도 자신의 발언이 "쇠락하는 프랑스 사회에 대한 나의 의견"일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럼에도 프랑스 법정이 그를 처벌한 것은 표현 자체의 과격함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과거에는 일부 종교 관계자들이 동성애에 대한 혐오표현을 공격적으로 표출하곤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한결 순화되고 정제된 표현으로 '점잖게' 반동성애 입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표현의 과격성에만 주목한다면 이렇게 에둘러 표현되는 차별 언동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또한 개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과 구조적 차별을 조장하고 고착화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혐오표현은 단순한 욕설이 아니다. <혐오표현에서의 해악>이라는 책으로 미국에서 혐오표현 규제 논쟁에 불을 지핀 정치학자 월드론(J. Waldron)은 혐오표현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회 구성원들이 존엄한 존재로서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미의 '공공선'(public good)을 파괴한다고 지적한다.

혐오표현에는 역사적 기원과 사회·경제적 이유가 근저에 깔려 있다. 실제로 혐오표현은 즉흥적이거나 일회적이지 않다. 예컨대 새치기를 당한 사람이 "이런 씨○, 어디서 이런 ○같은 짓을 해"라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이 심한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경우에 따라 모욕죄가 성립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하지만 이런 욕설에는 어떤 '뿌리'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어떤 행동으로 확대되는 것도 아니고, 그 말을 들은 다른 얌체족들의 사회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화가 나서 내뱉은 일회적이고 개인적인 욕설에 불과하다.

하지만 혐오표현은 뿌리 깊은 차별 관행이 '말'로서 분출된 것이다.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는 인종차별 문제를 천착한 저서 <인종차별의 역사>에서 인종차별이 논리적으로는 허술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단단한 '사상적 배경'을 갖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설파한 바 있다.

단단한 뿌리를 가진 혐오표현이 실제 행동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동성애 혐오표현을 입에 달고 사는 어떤 회사 중역이 동성애자 사원에게 어떠한 불이익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외국인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는 대학교수가 다문화 가정 출신 학생들을 차별 없이 대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을까? 흔히 혐오표현을 두고 '행위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혐오표현에 대한 몇몇 국제기준에서는 '표현' 대신 '선동'(incitement)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혐오표현의 행위성을 강조하는 한편, 그 적용 범위를 적절히 좁히고 있기도 하다.

2015-09-11-1441959949-6339436-6001597774_20150914.JPG

여성 혐오의 경우, 최소한 방송에서 일정한 제한을 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 인터넷 방송에서 여성 혐오발언을 한 것으로 드러난 옹달샘의 구성원 개그맨 장동민·유상무·유세윤이 지난 4월 여성 혐오발언에 대해 사과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같은 말이라도 관계에 따라 다르게 평가해야

1)과 2)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권력관계하에 행해진 발언이라는 것이다. 똑같은 말도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성희롱)에 관한 이론과 실무에서 발전해왔다. 여성의 외모에 대한 칭찬이나 술 따르기를 요구하는 것이 호의일 수도 있고 장난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고용이나 교육 등 권력이 작동할 수 있는 맥락에서 행해진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학생이 수업시간에 2)와 같은 말을 했다면 문제가 될 소지가 적다. 교수와 다른 동료 학생들과의 토론 과정에서 그 해악이 자연스럽게 치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공식적·비공식적으로 권력을 갖고 있는 교수에 의해 행해진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러한 발언은 학생으로서의(고용관계라면 노동자로서의) 정상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교육권(고용관계라면 노동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피해자의 맞받아치기(talking back)나 공론장에 의한 자율적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국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

인종, 성적 지향, 장애 등 다른 차별 사유에 입각한 괴롭힘도 마찬가지다. 혐오표현을 형사처벌하지 않는 나라들도 괴롭힘을 관용하지는 않는다. 형사처벌까지 하는 경우는 드물어도 국가인권기구, 고용평등위원회 등 비사법적 구제기관이나 민사 배상을 통해 적절히 규제한다. 한국 인권단체들이 만든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에서도 차별금지법과 차별시정기구를 통해 혐오표현을 규제해야 한다는 것을 잠정적 대안으로 제시한 바 있다.

표현이 어떤 '마당'에 던져진 것인지도 중요하다. 앞서 언급한 직장이나 학교뿐만 아니라, 방송에서의 표현도 해악이 크다. 방송이 갖는 공적 성격을 감안한다면, 방송에서 국제법과 국내법상 금지하고 있는 '차별'을 조장하는 혐오표현을 적절히 규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근 문제가 된 여성 혐오 같은 경우,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는 여성 혐오표현을 남김없이 규제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방송에서 일정한 제한을 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터넷이라는 마당은 어떨까? 인터넷 자체가 워낙 다양한 맥락이 있는 곳이라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한국의 맥락에서라면, 사적 커뮤니티와 포털 사이트는 다르게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같이 사적 커뮤티니에서의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포털 사이트 업체들이 자율적인 내부 규정을 통해 혐오표현을 걸러내는 것은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집단으로서의 소수자'임이 명확해져야

마지막 쟁점은 도대체 혐오표현의 대상이 되는 '소수자'를 누구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일단 차별 금지에 관한 국제기준과 국내법에 나열된 인종, 장애, 성적 지향, 성별, 연령 등의 차별적 속성을 가졌다면 혐오표현의 대상이 되는 소수자로 분류할 수 있다.

유럽에서 홀로코스트 부인죄가 자리를 잡은 것은 홀로코스트 부인이 단순한 역사 부정이 아닌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일제 찬양이나 민주화운동 부인을 처벌하는 법률이 추진되고 있지만, 이것이 유럽에서와 같이 정당화되려면, 일제 피해자나 민주화운동 관련자, 또는 특정 지역 사람들이 '집단으로서의 소수자'임이 좀더 명확해져야 한다.

물론 소수자 목록은 시대의 흐름과 각 국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유럽의 역사에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이 특수화되었다면, 한국의 특수성은 무엇인지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5·18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국가폭력의 피해자(가족)나 세월호 참사 같은 대형 참사·재난의 피해자(가족)들에 대한 모욕적 언사에서도 서구의 혐오표현 규제와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을까?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