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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24일 06시 15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8월 24일 14시 12분 KST

'혐오할 자유' 보장하는 미국? 멋모르는 소리!

홍성수의 혐오시대유감

이라크전에서 사망한 한 군인의 장례식장. 일군의 시위대가 피켓을 들고 몰려왔다. "이 군인을 죽게 한 신에게 감사한다." 사망한 군인은 동성애자였고, 시위대는 동성애가 미국을 망치고 있다고 믿는 어느 교회의 신도들이었다. 군인의 아버지는 분노했다. "그들은 장례식을 흥밋거리 보도 현장으로 만들었고, 우리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 했다." 심각한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명예훼손, 사적 공간에 대한 침해, 사생활 공표, 고의적인 정신적 고통 야기 등을 이유로 그 시위대를 고소했다.

지방법원은 총 500만달러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으나, 항소법원과 연방대법원에서 연달아 뒤집혔다(Snyder v. Phelps, 2011). 연방대법원은 그 시위가 미국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의 보호 범위 내에 있다고 판결했다. 장례식 자체를 물리적으로 방해하거나 가족의 면전에서 모욕을 준 것은 아니며, 공적 관심사에 관한 의견을 표명한 것이라는 이유였다. 단 한 명의 대법관만이 "자유롭고 공개적인 토론을 위한 우리의 심오한 국가적 약속은 이 사건에서 발생한 악의적인 언어폭력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반론을 폈을 뿐이다.

snyder phelps

이라크전에서 사망한 동성애자 군인의 장례식장에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의 신도들이 몰려와 "이 군인을 죽게 한 신에게 감사한다"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시위를 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 시위가 표현의 자유 보호 범위 내에 있다고 판결했다.

혐오표현 처벌에 요지부동인 미국

미국은 이런 나라다. 이런 행동까지 표현의 자유로 인정된다. 미국은 국제인권조약의 혐오표현 관련 조항을 '유보'했다. 혐오표현에 대한 형사처벌 법제도 없고, 민사배상의 범위도 매우 좁게 제한돼 있다. 표현의 자유에 관한 미국의 입장은 상당히 일관돼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신나치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 생존자·유가족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서 나치 복장을 하고 시위를 해도 이를 금지할 수 없다고 보았고(National Socialist Party v. Skokie, 1977),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모임 KKK단이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행하는 '십자가 소각'도 "임박한 불법행위에 대한 선동"에 해당하지 않거나(R.A.V. v. City of St. Paul, 1992), "위협의 의도"가 없다면 표현의 자유의 보호 범위에 있다는 판례를 내놓은 바 있다(Virginia v. Black, 2003).

혐오표현의 규제 필요성에 대한 국제적 합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혐오표현 처벌법을 제정하는 국가가 늘어가고 있지만, 미국은 요지부동이다. 혐오표현에 관한 한 미국은 민주주의국가들 중 '예외적 지위'에 놓여 있는 셈이다. TV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서 혐오표현 규제를 반대한 미국 대표 타일러가 다른 나라 대표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고립됐을 때, 그 장면은 예능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였던 것이다.

미국이 혐오표현에 대해 이렇게 '예외적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단순히 미국의 형식적 법제도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것은 그 맥락이다. 모든 현대 민주주의국가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헌법 규정을 두고 있고, 미국도 '수정헌법 제1조'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 이 조항의 지위는 좀더 특별하다. 혐오표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선, 20세기 초·중반 정치적 반대파들을 사회에서 추방했던 미국의 암울한 역사가 중요한 배경이다. 그 뼈아픈 교훈을 발판 삼아 미국 사회는 내용의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그 표현 자체에는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이것이 국가가 '견해차에 대한 차별'(viewpoint discrimination)이나 '내용 규제'(content-based restrictions)를 할 수 없도록 엄격하게 제한하는 이론으로 발전한 것이다.

여러 인종으로 구성된 이민자들의 국가라는 미국적 특수성도 영향을 끼쳤다. 미국 같은 다인종·다문화 사회가 하나의 국가로서 유지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통합적 가치가 필요하다. 그 가치가 특정 종교나 문화를 초월한 실질적 내용의 이념일 수도 있겠지만, 미국은 최소주의적 방식, 즉 '서로 침범하거나 간섭하지 말자'는 취지의 형식적 자유와 이를 보장하기 위한 '중립 국가'의 이념에 합의한 것이다. 존 할란 대법관의 말에 따르면,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는 "다양하고 인구가 많은 미국 사회에서의 강력한 치료제"였던 것이다.

자율적 해결 어려울 때는 엄격히 제한

이러한 합의의 배경에는 '공적 담론'(public discourse)에 대한 미국 사회의 강한 신뢰가 있다. 어떤 표현도 공적 담론에서 자유롭게 논의된다면 최선의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논의될 때, 그 표현이 '공적인 것' 여부가 유독 중시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소수자 집단을 모욕하는 발언이라고 해도 그것이 '공적 토론'을 야기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졌다면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수정헌법 제1조가 제정된 역사적 맥락도 빼놓을 수 없다. 중앙집권 국가를 꿈꾸었던 연방주의자들이 반연방주의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타협안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연방정부·의회의 강력한 권한을 제한하는 수정헌법 조항들이었다. 수정헌법 1조는 '표현'에 관한 한 연방정부가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던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에 혐오표현 처벌법이 없을 뿐, 혐오표현을 제한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기제들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사회는 혐오표현 문제가 공적 담론의 장에서 자율적으로 해결되기를 선호하는 것이지, 그와 무관한 맥락, 예컨대 공공·교육기관 같은 곳에서도 자연스러운 해결이 가능하다고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교수와 학생, 상급자와 하급자같이 권력 기제가 작동하는 곳에서도 그런 해결을 기대하진 않는다.

실제 상당수의 미국 대학과 기업들은 '차별금지 정책' 또는 '다양성 정책'을 수립하고 있으며, 혐오표현이 '괴롭힘'(harassment)에 해당하거나 실질적인 차별을 야기할 경우 징계할 수 있도록 하는 학칙이나 사규를 두고 있다. 소송을 통해 천문학적 액수의 손해배상 책임을 물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종차별 금지 정책은 말할 것도 없고, 친동성애 정책(LGBT-friendly policies)을 채택한 기업도 수두룩하다. 애플, 스타벅스, 마이크로소프트, 디즈니, 포드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기업들이 이 대열에 합류해 있다. 시민사회는 이런 기업들의 리스트를 '채용정보'로 제공하고, '이런 기업의 물건을 사자'고 호응한다. 세계 각국의 미국 대사관에는 동성애 직원 모임이 있고, 주한 미국대사관은 공식적으로 한국의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한 바 있다.

'차별'은 미국 기업들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혐오표현이 폭력으로 이어질 경우에는 '혐오범죄'로서 강력한 처벌이 가해진다는 점도 중요하다. 표현 자체를 처벌하진 않지만, 표현이 실질적 행동으로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오히려 더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아예 대통령이 수시로 나서서 인종차별이나 성소수자차별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천명하곤 한다. 차별 금지와 평등이 미국이 수호하는 가치라는 점이 국가적 차원에서 끊임없이 재확인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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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리버풀에 위치한 '국제노예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백인우월주의단체 KKK단의 복장. 홍성수

사회적 기제 vs 법,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

즉, 미국은 이런 맥락과 조건하에서 '표현 자체는 불개입'이라는 정책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혐오표현을 관용한다'는 것은 엄밀하게 보면 틀린 말이다. 관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처벌법을 두고 있지 않을 뿐이다. 실제로도 혐오표현 문제를 비국가적 기제로 규제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혐오표현이 실질적 차별이나 폭력을 야기할 때는 오히려 다른 나라들보다 더 강한 강제력을 동원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여전히 '유럽처럼' 혐오표현을 법적 강제 수단으로 처벌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처럼' 다른 사회적 기제들로 규제할 것인가의 논점은 유의미하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선택을 면밀하게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미국식 접근의 장점은 무엇보다 '일관성'과 '명확성'이다.

미국처럼 표현에 대한 개입 범위를 엄격하게 좁히면, 일관되고 명확한 법 적용이 가능해진다. 혐오표현을 처벌하기 위해 '내용에 대한 규제'의 문이 열리는 순간 표현의 자유에 관한 전선은 혼란에 빠진다. 어떤 내용의 표현을 규제할 것인지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혐오표현 규제법을 도입했지만 여전히 혐오표현의 개념 정의를 놓고 다투는 유럽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미국식 접근은 확실히 비교 우위에 있다. 어쩌면, 혐오표현 시위대를 눈뜨고 지켜봐야 하는 고통을 감수하는 대신, 표현에 대한 절대적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 좀더 유리한 거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이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지적은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혐오표현을 방치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국가에서 혐오표현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규제(법에 의한 강제 규제 vs 사회에 의한 규제)할지에 대한 것이지, 혐오표현을 관용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혐오표현에 대한 입장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대처 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일부 혐오주의자들이 미국의 사례를 들먹이며 '혐오할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진정한 '숭미(!)주의자'들이란

한국 사회에도 '미국식 접근'을 선호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분명히 확인해두어야 할 것은, 미국식 접근은 대통령이 수시로 차별 금지에 대한 입장을 확인해주고, 차별금지법이 각종 차별을 실질적으로 규제하고, 대학과 기업이 차별 문제에 민감하며, 표현에 관한 한 어떠한 내용 규제도 일관되게 불허하는 미국 사회의 맥락에서나 유효하다는 점이다.

이런 사회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면서 '동시에' 미국처럼 혐오표현 규제 처벌법에 반대한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숭미(!)주의자'요, 이 간단치 않은 논쟁의 진정한 '맞상대'다. 그들은 혐오표현 문제를 '국가의 개입 없이' 사회에서 직접 해결하자고 나선 또 다른 층위의 행동가들이기도 하다.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