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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3일 08시 36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13일 14시 12분 KST

사람이 한 마리 두 마리

gettyimagesbank

군복무 때, '과학화전투훈련'이라는 훈련에 참가했다. 흔히 군대에서 하는 작전훈련은 실제 전쟁 상황을 모사하지는 않는다. 적군이 내려왔을 때의 예상 시나리오를 미리 그려놓고, 그 동선대로 한 번 움직여 보면서 진지는 멀쩡한 지, 아군이 움직이는 경로는 실제로 어떠한 지를 확인해 보는 정도가 훈련의 의미다. 찌는 더위든 시린 발가락을 잘라내 버리고 싶은 겨울이든 밖에서 먹고 밖에서 자니 고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친 몸으로 쉬지 않고 걸어 다니는 것 말고 딱히 고생스러운 점은 없다.

'과학화전투훈련'은 그런 훈련의 개념을 완전히 부숴놓는다. 전국에 있는 수천 개의 부대 중 한 해에 (재수 없는) 스무 부대 정도만이 참가하는 이 거대한 훈련은, 강원도에 마련된 광활한 전투훈련장에 들어와 두 주를 보낸다. 한 주 동안 훈련장의 지리를 파악해 전투를 준비하고, 나머지 한 주의 5일은 이 훈련장에 상주하고 있는 '적군' 부대와 실제로 전쟁을 벌인다. 물론 정말 총탄이 날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대신 모든 군인들은 옷과 장비에 레이저 감응장치를 부착한다. 공포탄을 쏘는 총에 맞으면, 맞은 부위에 따라 팔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액정에 메시지가 뜬다. '경상: 찰과상', '중상: 내장출혈, 척추파손', 혹은 '사망.' 사망이든 중상이든 전투불능이 되면 곳곳에 숨어있는 감독관들이 퇴장시킨다. 그럼 조용히, 실제 전쟁 때 전사자를 담는 '시체백'에 들어가 시체처럼 누워있으면 된다. 아니, 실제 전쟁이라면 그 전장 위에 널브러져 있을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언뜻 레저로 즐길 법한 서바이벌 게임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이런 종류의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나서서 하겠다고 덤벼들 법도 하다. 철없는 소년들이 전쟁을 떠올릴 때 느끼는 묘한 설렘의 정서와도 닮아있다. 이 훈련은 확실히 말해준다. 진짜 전쟁의 순간들은 그런 박진감 넘치는 총격전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는 것을.

도처에 적들의 감시가 있기 때문에 낮에는 숨어서 진지를 정비하고 모든 활동은 밤에 이루어진다. 다섯 날 내내 누워 잘 수 있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담배 한 번 빠는 불빛조차 수 백 미터 밖에서 눈에 띄고, 그 즉시 좌표가 잡혀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를 포탄에 몰살을 당하기 때문에 아무 빛 없이, 길이 아닌 곳으로만 다녀야 한다. 수풀을 헤치고 다니다보면 수도 없는 생채기쯤은 신경 쓸 것도 못되고, 개울물 속을 걸었던 젖은 발이 찬 공기에 언 채 다시 자갈 위를 밟으면, 수포와 동상으로 뒤범벅되어 군화 속에서 썩어 들어간다. 밥 짓는 수증기가 보이면 또 포탄이 날아온다. 숨어서 지은 밥을 수송하는 차에도 바주카포가 날아온다. 실제로 거기 밥이 있어도, 레이저 장비에 완파된 걸로 뜨는 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못 먹는다는 말이다.

다섯 날 중 총성이 들려오는 순간은 거의 없다. 극도의 피로 속에서 언제 적이 나타날 지 긴장을 풀지 못하는 피로감이 무겁게 짓눌러 올 뿐이다. 마른 목에 삼키는 건빵으로 허기를 때우고, 조각잠 한 번을 달래지 못한다. 추위에 언 몸을 걸레가 된 발이 젖은 군화 속에서 쉬지 않고 옮겨낸다. 저 멀리 '전장효과묘사반'이 성실하게 만들어내는 폭음과 섬광이 쉬지 않고 눈과 귀를 긁어댄다. 그렇게 하루 이틀만 보내도 제정신을 붙들기란 이미 오래 전 이야기다. 차라리 어서 적의 총에 맞고 끝냈으면 싶은 마음이 수도 없이 든다. 인내심을 잃은 아군끼리 '시체백'에 누워 쉬기 위해 서로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일도 왕왕 벌어진다. 실제 전장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이다. 이 시뮬레이션 훈련은 그렇게 '진짜 전쟁'의 지난한 공포와 피로까지도 시뮬레이션 해준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느낀 전장의 공포는 그게 아니었다. 훈련 초반, 드물게 적군과 단체로 총격전이 벌어진 순간이 있었다. 줄지어 이동하던 아군들은 순식간에 엄폐물 뒤로 달려 숨었고, 곳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저기 내가 맞춰야 할 적군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쉴 새 없는 총소리와 자욱한 화약 냄새 속에서 적을 조준 사격하는 그 순간, 나는 핏속에 아드레날린이 도는 것을 느꼈다. 지루한 군 복무 중 배웠던 것들, 총을 늘 쥐고 사는 그 생활을 하며 한 번쯤 해봤을 영화 같은 상상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이었다.

상황이 정리 되고, 대열을 다시 갖추어 이동을 시작하자마자 곳곳에서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섯 마리 잡았다." "나는 세 마리." 아까 그 새끼 헤드샷 날렸어야 되는데 놓쳐서 아쉽네." 갑자기 등골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났다. 아까 그 소란 중에 내가 흥분했던가. 피가 돈다고 느꼈던가. 비록 공포탄이지만 사람을 쏘면서. 저 말소리와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울렸단 얘기구나. 공포를 느꼈던 건 그거였다. 실제 전쟁이었어도, 공포탄이 아닌 실탄으로 눈앞의 사람의 살을 뚫었어도, 저들은 똑같은 말을 했겠구나. 어쩌면 나도, 그 순간 가슴이 뛰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비인간화(dehumanization)'라는 개념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미군들로부터 본격적으로 부각되었다. 잔혹한 전장에 놓인 군인들은 종종 무고한 민간인들을 죽이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러한 죄책감이 트라우마가 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비인간화'라는 기제를 선택한다. 상대방을 인간으로 인식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내가 죽인 것은 사람이 아니었어. 이러한 기제가 작동하면 이들은 좀 더 마음 편히, 더 잔인하게 민간인들을 사살할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난 뒤 가정으로 돌아와 따뜻한 남편과 아빠의 옷을 무리 없이 다시 입을 수 있었다.

운전대만 잡으면 끼어드는 차를 향해 평소엔 하지도 않던 욕설을 쏟아놓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도로 위는 목숨이 달려있는 곳이니까 그만큼 민감한 거라고 말 하지만, 실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차라서 더 쉬워질 뿐이다. 비인간화는 그렇게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혹은 다른 인종 다른 언어를 향해 더 수월해진다. 자기 나라에서는 제아무리 학식이 뛰어난 외국인도,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말하고 있으면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다. 제국주의를 그린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떠드는 원주민들이 주인공의 눈에는 낯선 동물과 다를 바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자꾸 전쟁이란 말이 들린다. 종북 좌파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겠단다. 그게 진짜로 뭔지, 그 사람들이 정말 그런 사람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저 라벨을 이마에 붙이는 순간, 그들은 이미 '비인간화' 작업을 끝낸 것처럼 보인다. 어떤 근거를 들고 와서 설명을 해도, 정권의 결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모두 '다른 언어'가 됐다. 다양한 역사교과서로 배우고 싶다는 말도, 좀 더 나은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싶다는 말도, 폭등하는 주거비와 빈부격차에 이 나라가 지옥처럼 느껴진다는 신조어도, 저 전쟁을 선포한 이들에겐 모두 사람의 말이 아닌 것 같다. 어쩌면 그 날 군인들의 말 속에서처럼, 한 마리 두 마리로 호명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날의 소름이 다시 돋아온다.

* 이 글은 PD저널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