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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18일 07시 10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9월 18일 14시 12분 KST

소울푸드, 치킨

Flickr / Meryl Ko

입맛이 까다롭지는 않은 편이다. 사실 누굴 만나 뭔가 먹을 걸 정해야 할 때는 이렇게 달리 선호가 없는 사람들이 더 피곤할 때도 많긴 하지만, 아무거나 좋다고 해놓고 '그건 싫어'를 남발하지는 않는다. 보통 무얼 먹자고 하면 그러자며 따르는 편이니 정말 무던한 입맛인 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무슨 음식을 좋아하냐고 딱히 얘기할 음식이 떠오르지 않는다. 치킨만 빼고. 오죽했으면 입대를 앞두고 교회 학생들이 "선생님이 좋아하는 건 치킨밖에 몰라요"라며 입대 선물로 파닭을 몇 박스 포장해 왔을까.

그러고 보면 이리도 질리지 않는 음식이 있을까.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릴 때부터 제일 좋아하는 먹거리는 치킨이었던 것 같다. 그건 비단 나뿐이 아닌 듯한 것이 가로등도 변변찮은 변두리 초입에도 허름한 슈퍼마켓, 노래방, 그리고 치킨집은 꼬박 자리를 지키고 있고, 마늘치킨 간장치킨 닭강정 파닭 종류는 변해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스테디 프랜차이즈다. 몸매 걱정, 건강 걱정에 안 먹겠다는 사람은 만나봤어도 그저 튀긴 닭이 싫어서 먹지 않겠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치킨은 미국남부 흑인노예들의 '소울푸드'에서 출발했다. 한국에서는 그 의미가 많이 와전됐지만 '소울푸드'는 원래 '소울뮤직'이 그랬듯 흑인노예들이 고단한 삶을 달래기 위해 해먹었던 음식을 말한다. 좀 더 넓게는 미국의 노예계층을 넘어 전 세계의 하층민들이 없는 재료로도 맛있게 먹기 위해 만들어 온 음식들을 일컫기도 한다. 한국으로 따지면 부대찌개 같은 느낌일까. 치킨은 지금도 일상적으로 먹는 중에는 꽤 비싼 음식인데 노예들이 먹었다니 싶지만, 백인들이 주로 허벅지나 가슴살 등을 먹고 잘 건드리지 않았던 날개나 목 같은 부위를 남기면, 기름에 '딥프라이 Deep fry'를 해서 먹은 게 시초라고 하니 이해가 된다. 이러면 뼈까지 익어서 통째로 씹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살만 먹기에는 너무 양이 부족했던 게다. 이런 하층민 음식들에는 기름에 튀기는 요리가 많은데, 질 나쁜 재료들도 푹 튀기면 어지간히 먹을 만해지는데다 주로 육체노동자들이었던 하층민들에겐 고칼로리의 튀긴 요리가 주는 든든함이 무엇보다 큰 매력이었을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구두도 튀기면 맛있다고.

주인에 따라서는 노예에게도 마당에 닭 한두 마리씩은 칠 수도 있게 해줬고, 결국 주인집 요리도 흑인 노예들이 했기에 이따금 살이 많은 허벅다리나 가슴살도 자기들 방식으로 튀겨 내기도 하다 보니 백인들도 한 번씩 그 고소한 맛을 보았을 터. 이렇게 조금씩 계층을 넘어 보편적인 남부 요리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그렇게 전해져 온 것이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치킨이다.

한국엔 치킨집이 정말 많다. 시켜 먹는 빈도로는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나조차도 아직 이름도 금시초문인 치킨집들을 매번 새롭게 듣는다. 내가 사는 동네만 해도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오는 5분여 거리에 치킨집만 여섯이 늘어서 있다. 특히 현관을 열고 들어오는 바로 옆 건물의 '호식 씨가 두 마리를 튀겨주는' 집은 장사가 잘되는지 늘 문을 활짝 열고 몇 마리씩 닭을 튀기고 있다. 늦은 저녁 고단한 몸으로 그 앞을 매번 모르는 척 지나는 것도 몹시 고역인데, 여름밤 창문을 열어 놓고 있으면 저 아래서 냄새가 솔솔 올라오는 것도 괴롭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이 집은 다른 브랜드의 치킨집이었다. 똑같은 자리에서 그대로 닭을 튀겨 파니, 브랜드만 바뀌고 주인은 그대로인 건가 들여다보니 그건 아닌 듯 싶다. 지난 번 주인과 다른 얼굴이다. 지난 번 주인 아저씨에게는,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는 딸이 있었다. 그보다 좀 더 어린 아들도 있었던 것 같다. 보통 주택가의 배달 치킨집에는, 매장에 손님이 와서 앉아 먹을 수 있는 테이블까지 갖춘 곳은 잘 없다. 해서 그 작은 가게에 놓인 테이블 하나는 대개 그 집 아들내미 딸내미 차지다. 그 집도 그랬다. 잘 때나 입을 것 같은 분홍색 내복 차림을 하고, 한 여름 더위 속 끓는 기름에 닭을 튀기고 있는 아빠 옆에서 하기 싫은 숙제더미를 늘어놓고 한껏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기 일쑤였다. 다른 어느 치킨집은, 집에 들어가는 길에 한 마리 주문해놓으려 들어섰더니 주인 아저씨 아주머니가 초등학생 아들과 저녁을 먹을 참이었는지 치킨 튀기는 부엌에서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사실 치킨을 먹기엔 조금 이른 듯한 5시 경이었으니, 이 분들의 일과는 이렇게 미리 저녁을 먹으며 시작하는구나 싶었다. 생활의 냄새 가득한 이 공간들이, 이 가족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살풋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도 치킨은 다른 의미로 소울푸드다. 최근 대세였던 백종원 씨가 그런 말을 했는데,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에게 폭리를 취하지 않기로 유명하다는 평에 대해 '프랜차이즈 식당까지 하게 된 사람들은 더 갈 곳이 없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사람들 아닌가'라는 대답. 상대적으로 가게의 입지도 공간도 덜 쓰게 되는 치킨집 사장님들은 그 중에서도 비교적 끝자리에서 퇴직금 위에 얹은 대출금으로 끓인 기름에 닭을 튀기고 있는 게 대부분일 테다. 먹는 사람보다는, 파는 사람의 삶을 건 소울푸드.

노동개혁을 하겠다고 한다. 이제는 회사에서 내보낼 때, 대출금 보태서 치킨집이라도 차릴 그 퇴직금마저도 줄여보겠다는 이야기다. 성과 평가라는 것이 얼마나 악용될 수 있는지를, 내가 있던 회사에서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았다. 비정규직 근무기간을 늘려주겠다고 한다. 법정기준 근로시간을 한참이나 넘기도록 일을 하면서도 추가 수당은 꿈도 꾸지 못한 채, 고된 몸을 부둥켜안고 집에 들어와 치킨 한 마리에 캔 맥주 하나 마시는 것이 그나마 삶을 지탱하는 즐거움인 사람들이 그리도 우습고 하찮아 보이는지, 저 기업가라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뜯어보고 싶다.

* 이 글은 PD저널에 게재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