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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4월 13일 06시 58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4월 14일 14시 12분 KST

"바지 걷어보라" 판사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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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는다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경험인 줄 알지 못했다. 『사법부』에 등장하는 판사들의 실명을 내 이름으로 대체하며 물었다. 만약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무죄라 말할 수 있었을까.

『사법부』는 2004~2007년 국정원 과거사위 민간위원으로 활동했던 역사학자 한홍구(성공회대 교수)가 국정원 기밀문서를 토대로 쓴 책이다. 매서운 춘추필법은 1980년대 안기부와 경찰이 양산한 간첩 조작 사건에서 정점으로 치닫는다. 안전기획부란 문패처럼 정권의 '안전'을 위해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사건을 '기획'했지만 검찰 단계에서도, 법원 단계에서도 걸러지지 않았다. 검사들은 왜 여기에 와서 부인하느냐고, 안기부로 돌려보낸다고 을러댔다.

판사들은 "조작 간첩 사건 피해자들이 그토록 고문에 대해 호소했건만, 끝내 바짓가랑이 한번 걷어보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판사들은 고문당한 이들이 찍은 손도장을 근거로 신문조서와 자술서의 증거 능력을 인정했다. 수사관들의 고문을 방조한 것은, 87년 박종철을 죽인 것은 결국 판사들의 판결이었다.

2. 곤혹스러운 사실은 현직 판사에 대한 물리적 압력은 없었다는 점이다.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해야 할까. 판사들 자신이 정치 권력과 대법관 꿈에 순치된 결과였다. 한홍구는 "차라리 중앙정보부-안기부가 법관들을 잡아다 협박하고 고문해서 사법부가 저 지경이 되었다면 덜 슬펐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법원에 대한 '유죄 판결 유도' '강력 조정' '협조 요청'(내부보고서 용어)은 사라졌다. 조사실에서 고문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세련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압박 조사로 남아 있지는 않을까. 지금의 전선은 보이지 않아 상대하기 어렵다.

3. 재판의 본질은 회색으로 보이는 현실에서 흑(黑)과 백(白)을 가려내는 데 있다. 웬만한 열정 없이는 뚫고 나아갈 수 없다. 열정 잃은 판사는 형식논리에 맞춰 판례에 따라 판결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판결문은 깔끔해서 좋지만 한 사람의 인생은 망가진다. 사법부의 보수화 속에 판사들이 의욕을 잃어 간다는 경고음은 커지고 있다. 판사 출신 변호사의 말이다.

"재판에 가서 법리적인 문제를 제기하면 판사들이 자꾸 '대법원 판례를 보면...'이라고 얘기해요. 판례도 시대에 안 맞으면 바꿔야죠. 사건 수도 많고, 바쁜 건 이해하지만 이런 식이면 판사 2700명이 왜 필요합니까. 대법관 13명만 있으면 되지...."

밀실이 아닌 공개 법정에 모든 증거를 꺼내놓고 판단하자는 공판중심주의도 후퇴하는 분위기다. 피고인이 억울함을 호소할 때 수사 기록에서 눈을 떼 바짓가랑이 걷어보라고 말하는 게 공판중심주의다. 2016년의 법정을 또 다른 이름의 무기력이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가.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