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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3월 23일 07시 01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3월 24일 14시 12분 KST

유신헌법 1조 2항의 망령

내가 우려하는 건 사회에 미칠 영향이다. 그룹 정체성에 맞지 않거나 회장님 방침과 다른 의견을 말하는 임직원들은 컷오프 될 것이다. 두산그룹 계열사는 40대 직원이 명퇴를 거부하자 하루 종일 벽만 바라보게 하는 면벽(面壁) 책상 배치를 했다. 유승민 의원의 자진사퇴를 집요하게 압박하며 공천 발표를 미루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에 대한 무례함은 권력자의 습관이다.

Gettyimage/이매진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2016년 한국 사회엔 유신헌법 제1조 2항이란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1972년 선포 당시 홍보자료 『유신헌법 해설』은 이렇게 해설한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온 국민의 주권적 수임기관이며...대표민주제와 직접민주제를 병행시키고 있다...유신헌법의 이념자(理念者)인 박정희 대통령은 강력하고 효율적 정부체제를 원하였다...대통령의 지위 강화는 현대국가에 있어서의 '권력의 인격화'로 특징 지워지며....'

유신헌법이 관 뚜껑을 열고 부활한 것일까.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 공, 천, 학, 살이란 네 글자 앞에 납작 엎드렸다. 컷오프(공천배제)의 핵심 기준은 '당 정체성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 사람'이다. 당 정체성? 새누리당 당헌 제2조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이념으로 인권과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한반도의 평화통일과 21세기 선진 일류국가를 창조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한다.(새누리당 홈페이지)

그러나 박종희 공천관리위원은 당 정체성을 당헌 8조에서 찾았다.(15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당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적극 뒷받침하며 그 결과에 대하여 대통령과 함께 국민에게 책임을 진다.' 그의 주장대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인권, 정의보다 대통령의 국정운영이 우선한다면 새누리당의 정체성은 유신헌법 1조 2항에 가깝다.

박근혜 대통령의 '진실한 사람' 지침에 따라 전개되는, 적나라한 권력의 포르노그래피는 새누리당의 헌법적 정당성을 의심케 한다. 이러고도 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향하는 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는 잔혹극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 청구 소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국정에 여당 의원들의 협조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문제는 협조를 구하는 방식이다. 대화와 설득이 아닌 공천권으로 각을 잡는다고 해서 국정이 뜻대로 돌아가진 않는다. 일사불란한 조직은 위험하다.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폭발한 건 불량 고무 오링(O-ring)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 원인은 실무기술자들이 입을 닫은 채 상부 지시를 수동적으로 따른 데 있었다. 내부에서 비판·교정하지 못한다는 치명적 문제가 조직의 존립을 뒤흔드는 파국으로 이어진다.(『착각하는 CEO』)

이번 공천은 임기 후반 한 방울의 권력 누수까지 봉쇄하기 위한 전초전 성격이 짙다. 요체는 불안과 공포다. 행정부처에서도, 검찰에서도, 국정원에서도 정체성은 더욱 확고한 컷오프 기준이 될 것이다. 대통령을 진실하게 보좌하는 이들만 살아남고, 완장 찬 투명인간들이 이 사무실, 저 사무실을 기웃거릴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건 사회에 미칠 영향이다. 그룹 정체성에 맞지 않거나 회장님 방침과 다른 의견을 말하는 임직원들은 컷오프 될 것이다. 두산그룹 계열사는 40대 직원이 명퇴를 거부하자 하루 종일 벽만 바라보게 하는 면벽(面壁) 책상 배치를 했다. 유승민 의원의 자진사퇴를 집요하게 압박하며 공천 발표를 미루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에 대한 무례함은 권력자의 습관이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대위 대표의 비례대표 공천 논란은 한국 정치가 얼마나 '대표자 도그마'에 빠져 있는지 보여준다. 정당민주화·정치민주화 없이는 경제민주화도 추진력을 얻기 어렵다. 납득 가게끔 설명하는 대신 "그 따위로 대접하는 정당"이라고 역정을 내는 그에게서 또 다른 권위주의가 읽힌다.

내부 비판이 사라진 사회는 조금 더 위험해질 것이다. 그래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유신헌법 1조 2항의 위력이 크다 한들 시대를 되돌릴 순 없다. 그건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지금 우리의 헌법이다.

함께 소리 내어 읽어 보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