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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15일 09시 48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9월 15일 14시 12분 KST

'B급 덕후'의 고백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중학교 때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봄여름가을겨울의 라이브 앨범을 테이프로 산 이후, 미친 듯이 음반을 모았던 열정이, 맙소사, 아직도 내게는 '있.다.' 사실 '언제부터'가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그보다는 왜 '아직도 있을까'를 고민해본다. 나는 지금도 돈이 좀 모였다하면, 몇 가지의 것들을 컬렉션하는데 열과 성을 다한다. LP, 만화책, 그리고 만화 원피스의 '피규어'다.

첫 번째로 LP. 내가 LP(다른 말로는 바이닐(Vinyl))을 사는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일단 당연히 음악을 듣기 위해서 산다. 그런데 이게 LP 구입의 가장 큰 동기는 아니다. 그렇다. 나는 이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산다. 요즘 음반 시장의 트렌드 중 하나는 LP의 소비가 늘고 있다는 것. 커버가 멋진 LP를 산 나는 '반드시' 이걸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떡하니 올려놓는다. '좋아요'가 늘어갈수록, 나는 행복하다.

그러나 LP를 나에게 '덕질'이라고 하기에는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내 직업이 음악평론가나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인 이상, 이게 내 인생에 있어 쓸모가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이다. 덕질의 존재가치는 어디까지나 '쓸데없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야 마땅하다. 원피스? 만화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내가 여장하는 취미가 있나, 의심할 지도 모른다.(솔직히 관심 있다. 내가 다리가 예쁘다.) 게다가 원피스 '피규어'라고? 나는 오늘도 불주먹 에이스의 피규어를 바라보면서 정상전쟁에서 있었던 그의 사망을 애도한다. 에이스의 옆에는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대해적 시대를 연 전설적 해적 '골 디 로저'가 우뚝 서 있다. 아아. 이것은 바로 사나이의 로망. 두 해적이 내뿜는 광휘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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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B급 덕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B급에 불과한 이유, 그건 앞서도 언급했듯이 덕질의 방향성 때문이다. 나의 덕질은 100퍼센트 나 자신만을 향해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B급이다. 그렇다면 A급은 어떤 사람인가. A급 덕후는 예를 들어 내 친구 심형탁 같은 경우를 말한다. 통상 '도라에몽남'으로도 알려져 있는 형탁이의 덕질은 나와는 근본부터가 달랐다. 그는 그러니까, '도라에몽남'으로 뜨기 전부터 '도라에몽남'이었다. 그 누구에게 과시하기 위한 덕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가 못하다. 나는 나 자신의 기쁨을 위해 덕질을 하는 동시에 그것을 SNS에 자랑하기 위해 덕질을 한다. 형탁이에 비하자면 참으로 미천한 덕질이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내가 그냥 좋아서 음반을 사고, 만화책을 모았다. 그런데 SNS라는 공간에 빠지면서 나의 덕력은 타락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무언가를 손에 넣으면, 이걸 어떻게 예쁘게 찍어서 페북에 올릴까를 먼저 고민한다. 덕계에도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나는 아마도 지옥행. 저 위에 계시는 덕신께서 혀를 끌끌 차면서 벌을 내리실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싶다. 나는 그저 인정받고 싶은 거라고, 관심병 종자라고, 그러니 나에게 아이고 굽신굽신 좋아요 버튼 하나 하사해주십사, 부탁드린다고 말이다. 나는 이게 전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리어 덕욕을 불태우기 위한 가장 훌륭한 연료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덕질에 관한한, 나는 폭주하는 욕망의 기관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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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에 대해 말해야 한다. 나는 책보다 만화책이 많은 (방송) 작가다. 권수를 세어보진 않았지만, 3000권은 확실하게 넘는 만화책을 보유하고 있다. 사람들은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고 말한다. 나는 심지어 만화책에 관한한, 휴덕을 해본 적도 없다. 나는 오늘도 정말 열심히 일을 했는데, 그 주요한 원천 중에 하나는 바로 만화책을 사기 위함이다. 즉, 덕질의 기본 바탕에는 '경제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돈을 못 벌면, 덕질도 못 한다. 간단한 세상의 이치다.

나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덕후들이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간단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먹고 살기 힘든 사회에서 무슨 덕질이냐"는 것이다. 덕후들은 이렇게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이 먹어야할 욕까지 감내해야하는, 슬픈 종족이다. 과거에 비해 덕질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글쎄, 지금 당장 피규어 관련한 기사의 덧글을 확인해보라. 반 이상이 욕이다.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자 한다. 덕질도 하나의 '취향'이라고 정의한다면, 단순한 소비 아닌 취향에 기반한 소비에는 묘한 위로의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덕질의 대상이 그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만 진짜 세상과는 격리된 자기만의 덕계를 완성해나가면서, 덕후들은 안정을 찾고 다시 사회로 뛰어들 원동력을 얻는다. 나는 지금도 심신이 힘들어질 때면 LP를 사고, 만화책을 구입하며, 피규어를 주문하고 미소를 짓는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분들이여, 부디 나 같은 종자를 이해해주길. 나의 덕계 안에서 오늘도 나는 평안하다.

글 |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청춘을 달리다' 저자, SNS 냉면왕)

* 이 글은 패션지 '코스모폴리탄'에 기고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