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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22일 11시 55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22일 11시 56분 KST

가능성이 달아나 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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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이라도 보자는 말을 좋아한다. 굳이 무언갈 함께 하지 않아도, 서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그 감정에 대한 숨김없는 표현. 오랜만에 연락이 온 그녀는 이번에도 이 말을 가장 먼저 건넸다. 직업 특성상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은 우린, 약속을 정하면서도 혹시 모를 변동에 대해 서로에게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이번 주말 업무는 비슷한 시간대에 마무리 지어졌다.

"우리 회사에 되게 멋있는 분이 계셔."

반 년 만에 보는 얼굴. 그녀는 처음 본 그때처럼 싱그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근래 있었던 좋은 소식들을 주고받고 나니, 대화는 자연스럽게 회사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녀는 그날, 함께 일하고 있는 20년 차 카피라이터 분의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내공이 쌓인 그분은, 그분 만의 독특한 감성을 갖고 있었다. 그분이 아니면 쓸 수 없을 글이라고 했다. 몇 줄만 읽고도 글쓴이를 알아차릴 수 있으려면 과연 얼만큼의 노력이 필요할까. 짐작이 잘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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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그게 참 멋있지. 자신 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다는 게. 근데 최근에 진짜 멋있는 분이구나, 느낀 건 글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에 꾸준한 관심을 두신다는 거야. 작년 여름이었나. 갑자기 시나리오 쪽이 궁금해졌다고, 곧바로 학원에 등록하시더니 그저께 그게 정말 영화로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시는 거 있지. 배우는 단계까지 가는 것도 어려운데, 또 다른 직업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쌓으셨다는 게 진짜 대단한 것 같아. 나는 회사 일 하나 하는 것도 이렇게 버거운데."

아웃풋보다는 인풋이 많아야 할 시기라고, 그게 꼭 일과 관련되지 않아도 좋으니 뭐든 넣어 두라고, 나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해주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을 했다.

"바쁘다고 미뤄두면 안 돼. 네가 뭘 좋아하는지, 네가 뭘 잘할지는 해봐야 안다. 그건 너 자신도 몰라. 아니다. 어쩌면 너라서 더 모를 수도 있어. 지금까지의 경험만 놓고, 이건 못할 거야, 이건 잘할 거야 미리 재게 되거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었지만, 매번 시작까지 가지 못했다. 배우기도 전에 겁을 먹거나 확인해보기도 전에 뒷전이 되거나.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짐으로만 끝난 날들이 생각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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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 나도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거든? 맨날 해야지 해야지 하고 반 년째 찾아보지도 못하고 있어. 이렇게 언니한테 꼭 배울 거라고 얘기해두면 책임감을 갖고서라도 하지 않을까? 속으로 해야지 해야지, 하는 거보다 이렇게 가까운 사람한테 할 거다 할 거다, 이야기해두는 게 훨씬 효과가 좋대. 그 카피라이터 분도 그랬고. 그때의 설레는 표정이 너무 좋았어."

조그만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기 좋아했던 그녀는 도자기 굽는 걸 꼭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너무 잘 어울리는 일이라 나도 모르게 이번 주에 당장 알아봐봐, 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나에게도 나만의 문체가 있을 거라고, 그게 차곡차곡 쌓이면 더 많은 걸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가능성이란 것은 다른 데 신경을 쏟는 사이, 저만치 달아나 버리기 쉬웠다.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채, 훌쩍 지나가버린 것은 제 시기를 기다리다 지쳐 떠나버린 것 같았다. 그날, 다시 떠올려보았다. 나를 스쳐 지나간 몇몇 가능성들을. 그리고 다시 마음을 먹었다.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몇 번이고 가슴 뛰는 것을 찾아 떠나는 그분처럼.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