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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15일 11시 45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15일 11시 56분 KST

택시기사님이 보낸 문자

마음의 여유가 조금도 없던 날이었다. 재밌게 했을 일도 모두 짐으로 여겨질 뿐, 예정보다 2시간가량 당겨진 녹음도 그날은 달갑지 않았다. 곧바로 보이던 빈 택시조차 30분 넘게 잡질 못했다. 이런 날은 뭘 해도 안 되는구나. 불만만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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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유가 조금도 없던 날이었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닌 걸 알면서도 마음에 꽂힌 말들이 빠지기는커녕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왜 하필 이런 날 일까지 몰려서. 재밌게 했을 일도 모두 짐으로 여겨질 뿐, 예정보다 2시간가량 당겨진 녹음도 그날은 달갑지 않았다. 곧바로 보이던 빈 택시조차 30분 넘게 잡질 못했다. 이런 날은 뭘 해도 안 되는구나. 불만만 쌓여갔다.

"이 주소로 찍고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백미러로 나를 힐끔 바라 본 기사님은 젊은 아가씨가 오늘 일이 엄청 많은가 보네, 하며 주소를 찍어주셨다. 나는 더 이야기할 여유가 없다는 표시로 짧게 대답만 한 후, 출력해온 서류를 훑었다. 기사님이 몇 마디 질문을 더 던졌지만, 그게 무엇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을 만큼 정신은 다른 데 가 있었다. 나는 택시가 멈춰 서자마자 서둘러 계산을 하고, 녹음실로 뛰어들어갔다.

"딱 맞춰 오셨네요. 성우분들도 다 오셨는데, 녹음 바로 시작할까요?"

실장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서류를 꺼냈다. 그때 오른손에 내내 쥐어져 있던 만년필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까까지 분명 들고 있었는데. 잃어버렸을 리가 없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문구를 새겨준 선물이었다. 이 만년필로 좋은 카피 많이 많이 써야 해. 그가 했던 말이 무언가를 쓸 때마다 떠올라 늘 신경 써서 챙겼었는데 주머니에도, 가방에도,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택시가 떠올라 해당 회사로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쪽에선 기사님의 개인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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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기사님, 바쁘신데 죄송해요. 아까 논현동에서 내린 사람인데, 혹시 뒷좌석에 만년필 하나 떨어져 있는지 바로 확인해봐 주실 수 있을까요? 저한테 정말 중요한 거라서요."

기사님은 처음 택시 탔을 때의 그 친절한 말투로 바로 찾아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전화를 기다리는 사이 예정돼 있던 녹음이 시작돼 버렸고, 내내 신경이 곤두선 채 일을 진행해야 했다. 정말 미안. 각인까지 해준 건데.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어. 미안해. 그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 오늘 왜 이러는 거지. 내게 너무한 하루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핸드폰엔 기사님의 부재중 전화가 잔뜩 찍히고 있었다.

"아가씨, 미안해요. 곧바로 차 세우고 찾아봤는데 없네. 아가씨 내리고 탄 손님이 없었는데. 혹시 모르니까 다른 데 있는지도 한 번 찾아볼래요? 나도 더 찾아볼게요."

기사님의 말에 잔뜩 상심한 채 녹음실 근처를 한참 배회했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울해진 상태로 다시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때 기사님으로부터 또 한 통의 문자가 왔다.

- 다시 차 세우고, 시트까지 들쳐내 확인해봤는데 없어요. 아가씨한테 정말 중요한 물건인 것 같은데 미안합니다.

나는 괜찮다고, 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회사에 가서 다시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3시간 후, 다시 문자가 왔다.

- 중간중간 손님들한테도 물어보고, 차고지 들어와서도 확인했는데 꼼꼼히 뒤져봐도 없는 걸 보니 내릴 때 떨어뜨린 것 같아요. 아쉽네요. 꼭 찾아드리고 싶었는데.

업무를 보던 나는, 하던 일을 멈춘 채 그 문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우린 아주 잠시 마주친 사이일 뿐인데. 기사님은 종일 낯선 이의 물건을 찾아주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중간중간 손님들이 내릴 때마다 뒷자리를 확인했을 기사님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하루 종일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회사라는 익숙한 공간, 누군가에게 베풀 친절은 물론, 나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었건만. 그 여유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한 자 한 자 천천히 답장을 써 내려갔다.

- 업무 중에 죄송해요. 이렇게 열심히 찾아봐 주신 것만으로도 저한텐 큰 위로가 되는 날입니다. 고맙습니다.

문자를 쓰는 동안 잔뜩 곤두서 있던 마음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결국 만년필은 찾지 못했지만 내가 종일 찾아 헤맨 것은, 잠시 마주쳤던 그 택시 안에 있었다.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