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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9일 06시 18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12월 29일 06시 22분 KST

테러의 시대에 '선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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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변호사 페르디난트 폰 시라흐가 각본을 쓴 연극 '테러'는 2015년 베를린에서 초연된 이래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테러'는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된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격추한 전투기 조종사 라르스 코흐 소령을 둘러싼 재판을 다루는 법정 드라마다. 항공기는 7만명의 관중이 독일과 영국의 축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스타디움으로 향하고 있다. 코흐는 7만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164명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여객기를 격추한다. 연극 막바지에 관객들은 작은 장치의 버튼을 눌러 코흐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판결을 내린다. 판사가 그 결과에 따라 판결문을 낭독하고 연극이 끝난다. 예상할 수 있게도, (적어도 서구에서라면) 대부분의 관객은 코흐가 무죄라고 판결한다.

우리가 이 연극에서 주어진 선택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느끼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선택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선택에는 분명하고 단순한 그림을 만들기 위해 말해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어려운 선택에 직면한 한 사람의 개인으로 호명된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여객기를 격추해야 하는가라는 선택의 명료함 때문에 다른 질문들에 대한 판단은 오히려 흐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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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디움에 있던 이들을 대피시킬 수는 없었을까(당시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테러 행위가 일어나게 된 지정학적 이유는 고려됐나? 또는 아랍에 대한 군사적 개입 문제는 어떤가? 우리가 언제 이것들을 선택한 적이 있었던가? 이 중 하나라도 선택권이 주어진 적이 있었나?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저 결과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왜 우리는 항공기를 격추할 것인가 말 것인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부담을 져야 하는가?

그러나 이 연극에는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지점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코흐가 여객기를 격추하기로 했을 때, 그가 자신만의 존재론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무언의 사회적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코흐가 군 상관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군은 이미 코흐가 결국 여객기를 격추할 것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암시적으로 명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군은 이를 직접 표현하는 것만큼은 회피하려 한다. 이는 내가 최근 마케도니아 스코페의 어느 호텔에서 경험한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료가 호텔 직원에게 객실에서 흡연해도 괜찮은지 물었다. 대답이 걸작이었다. "객실에서의 흡연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객실에 재떨이가 마련되어 있으니 크게 불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방에 들어가 보니 탁자 위에는 정말 유리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재떨이 바닥에는 담배 그림 위에 빨간색 원과 사선 빗금이 쳐진 금연 표시가 있었다. 호텔 직원이 금연이라고 안내하면서도, 객실 창문을 열고 주의해서 담배를 피운다면 괜찮을 거라고 귓속말로 알려주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금지와 허용은 상쇄되어 애초에 없었던 것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코흐의 상관은 같은 메시지를 흘린다. "여객기를 격추하는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 그러나 너는 여객기를 격추하라."

이는 군대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군복무 할 때, 국제 군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장교는 국제 군법상 강하 중인 낙하산을 사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하필 다음에는 사격 훈련이 이어졌고, 전 시간과 같은 장교가 수업을 진행했다. 그는 낙하산을 조준할 때는 낙하산의 강하 속도, 바람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료 한 명이 전 시간에는 사격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장교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바보 같군. 그렇게 세상 사는 법을 몰라서 되겠어?" 고문에 대한 논쟁도 다르지 않다. "고문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워터보딩'(물고문)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가 미국 정부의 입장 아니었던가?

그러나 핵전쟁과 관련된 대중적 상상력은 이와는 사뭇 다른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의 무시무시한 사례를 살펴보자. 1962년 10월27일 쿠바 인근 해역에서 미 해군 구축함과 소련 핵잠수함 B-59호 사이에서 벌어진 접전은 하마터면 핵전쟁으로 이어질 뻔했다. B-59호를 발견한 미 해군 구축함은 B-59호에 핵 어뢰가 장착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잠수함을 강제로 부상시키기 위해 연습용 폭뢰를 투하했다. 잠수함에 승선한 장교 바딤 오를로프가 나중에 밝힌 바에 의하면, 교전규칙에 따라 선임 장교 세 명이 전원 합의를 했을 경우에만 핵 어뢰를 발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임 장교들이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두 명은 발사를 주장했지만, 부함장 한 명만은 이에 반대했다. 어느 역사가는 "바실리 아르히포프라는 부함장 한 개인이 세계를 구한 것"이라고 씁쓸히 논평했다. 우리는 미국과 북한, 미국과 다른 국가 간 대치가 이어질 때도 비슷한 상상을 하는 것이 아닐까? 어느 용감한 개인이 나서서 광기가 반복되는 것을 막아내는 상황 말이다.

이처럼 한 개인에게 희망을 거는 경향은 그 자체로 전체적인 상황의 광기를 보여준다. 페르디난트 폰 시라흐의 연극 대사를 보면서 '북한이 괌에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미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와 같은 일련의 선택들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은 전체적인 상황에 내재한 광기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내리는 결정은 "더 많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까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켜도 되는 것일까"의 수준이 아니다. "적에게 보복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라면, 무관하고 무고한 이들을 몇백만명까지 죽여도 되는 것일까"의 수준인 것이다. 이것이 지도자들이 핵 분쟁의 재난적 결과를 이야기할 때 의미하는 바다. '수백만명, 그리고 또 다른 수백만명이 희생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핵으로 적을 맞받아쳐야 한다.'

김정은이 미국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고 위협할 때, 김정은이 자신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은 자신이 마치 판타지 게임을 하고 있는 양, 자신이 있는 북한은 핵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것처럼 말한다. 냉전기 핵전략의 기본 원리가 '상호확증파괴'였다면, 오늘날 핵전략의 기본 원리는 '핵 사용 목표 선정'인 듯 보인다. '핵 사용 목표 선정'은 외과수술적 선제공격을 통해 적의 핵시설을 파괴하면서도,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통해 상대측의 보복 공격은 막아낸다는 이론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은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에는 '상호확증파괴' 전략을, 이란과 북한에는 '핵 사용 목표 선정' 전략을 쓴다. '상호확증파괴'의 역설적인 작동방식은 '자기실현적인 예언'을 '자기 억제의 의지'로 바꾸어 놓는다는 점이다. 한쪽이 선제 핵 공격을 하면, 상대방은 최대한 파괴적인 무력을 동원해 보복 핵 공격을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쌍방이 모두 파괴되는 상황을 확증하게 되어 핵전쟁이 발생하지 않게 된다. '핵 사용 목표 선정'의 논리는 반대다. 적을 선제공격하고도 보복 공격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적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초강대국이 모순된 반대 전략을 동시에 쓴다는 점 자체가 전체 추론 과정의 환영적 성격을 보여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사용과 관련한 모든 논의가 그 자체만으로도 범죄화될 수 있도록 광범위한 국제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다.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는 국가 지도자는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되어야 한다. 그들은 외설적 존재이자 괴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집단 보이콧에서 개인적 망신 주기까지 어떤 수단이라도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